📅 2026년 02월 27일 07시 01분 발행
늦은 저녁 부엌은 하루치의 이야기로 반짝입니다. 싱크대에서 그릇들이 서로 살짝스레 닿을 때 나는 얕은 금속 소리, 고무장갑에 톡톡 부딪히는 접시의 온기, 거품이 흩어지며 남기는 작은 무늬들. 물을 잠그면 소리도 따라 잦아들지요. 그때 마치 숟가락 하나가 마음속으로 미끄러져 들어오는 것처럼, 오늘의 마지막 문장이 제자리로 돌아오는 느낌이 듭니다.
그릇을 행구고 높이 세워 말리다 보면, 가장자리의 미세한 흠집들이 눈에 밟힙니다. 하루에 몇 번씩 오르고 내려온 칼과 젓가락이 남긴 자국들. 예전에는 새 기스가 보이면 속상했는데, 요즘은 그 흔적들이 묘하게 든든하게 보입니다. 이 집에서 밥을 먹고, 말다툼을 하고, 화해를 하고, 기다리고, 먼저 먹지 말고 함께 먹자고 참아왔던 시간들이 그 자국에 걸려 빛나는 것 같습니다. 유약이 살짝 금 가며 생기는 그물무늬가 있는 사발처럼, 마음에도 보이지 않는 빙열이 생기곤 하지요. 잡히지 않는 그 균열이, 그러나 어떤 날에는 빛을 더 많이 모읍니다.
오늘도 말들이 부딪혀 거품이 일던 순간이 있으셨을지요. 너무 서둘러 던져진 말, 미처 닦아내지 못한 표정, 생각보다 오래 남아 나중에서야 씻겨내려가는 서운함 같은 것들. 물속에서 거품이 가라앉듯 천천히 사라지기를 기다리다 보면, 바닥에서 맑은 면이 하나 둘 드러납니다. 그 아래에서 우리가 정말로 붙들고 싶었던 문장이 고개를 내밉니다. ‘괜찮습니다’와 ‘미안합니다’, 그리고 ‘고맙습니다’ 같은 짧은 말들. 오래 만져 쓸수록 표면이 반들어지는 나무 손잡이처럼, 이 말들은 닳을수록 더 믿음직해집니다.
수건으로 물기를 닦아내다 보면 모서리에 매달린 마지막 물방울이 유독 또렷합니다. 떨어질 듯 말 듯 버티는 그 한 점을 보고 있으면, 오늘 남은 마음의 조각들이 함께 떠오릅니다. 밥상에 흘린 국물, 이가 조금 나간 접시, 서랍에서 제때 찾지 못한 수저, 그래도 함께 펼친 상차림의 온기. “남은 조각을 거두고 아무것도 버리지 말라” 하시던 말씀이 문득 귀에 감깁니다. 아껴 모아 다시 살림을 이어가듯, 마음에서도 버려야 할 것과 남겨야 할 것을 가늠해보게 됩니다. 미련을 버린 자리에는 가볍게 걸어갈 발자국이 생기고, 남겨 둔 감사에는 내일을 여는 향이 배어듭니다.
하나님은 가끔 우리의 부엌 같은 곳에서 숨을 고르게 하시는 분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대단한 재료가 없어도, 서툰 손놀림이라도, 상 위에서 나누어진 기도와 웃음이 있으면 그날의 식탁은 완성되었지요. 잘 닦인 그릇만이 쓰임 받는 게 아님을, 손때가 묻은 사발이 가장 자주 가운데에 놓인다는 사실을, 마음은 알면서도 자주 잊습니다. 흠집을 질책하지 않으시고, 그 흠집으로 우리의 자리를 기억해 주시는 분. 공평하게 나눠 담으려고 애쓴 마음, 마지막 숟가락을 남겨 두던 배려, 먹다 말고 먼저 눈을 들어 서로의 얼굴을 확인하던 습관을 하나님은 오래 기억하실 것 같습니다.
부엌 불을 끄기 전, 그릇 위에 매달린 마지막 물방울이 마침내 내려앉습니다. 소리 없이 바닥으로 스며들고, 다음 차례의 그릇이 그 자리를 채웁니다. 오늘 또한 그렇게 자리를 내어주며 끝나갑니다. 다 닦이지 않은 부분이 있다 해도 괜찮습니다. 손에 남은 미열과 식탁의 그림자, 그리고 부드럽게 겹쳐진 사과 껍질의 향만으로도 충분합니다. 내일 아침 같은 그릇을 다시 꺼낼 수 있겠지요. 숨기지 않은 흔적 위에, 더 정직한 맛을 담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