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도마가 마르는 밤

📅 2026년 01월 24일 07시 01분 발행

늦은 저녁, 설거지가 끝난 부엌은 작은 호흡만 남겨둔 듯 고요합니다. 젖은 그릇들이 접시꽂이에서 빛을 흘리지 않으려 애쓰고, 나무도마는 세워져 조용히 물기를 놓아줍니다. 표면에는 칼날이 남겨놓고 간 얇은 선들이 겹겹이 눌려 있습니다. 가까이 보면 선마다 방향이 다르고 깊이도 다릅니다. 양파를 채칠 때 생긴 가벼운 긋기, 호박을 나눌 때 멈칫한 흔적, 마음이 급했던 날의 자취도 있는 듯합니다. 향이 완전히 가시지 않아, 마늘과 레몬이 섞인 냄새가 나무결 사이에서 은근히 올라옵니다.

처음 들여왔을 때의 도마는 매끈했고, 빛을 곧게 반사했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며 그 표면은 거칠어지고, 결은 드러나고, 칼자국은 지도를 닮아갔습니다. 이상하게도 그때부터 손은 더 안심했습니다. 매끈함은 아름다웠지만 쉬 미끄러졌고, 상처가 많아질수록 도마는 오히려 조용히 자리를 잡아 주었습니다. 쓰임의 흔적이 도구를 도구답게 하는 것인지, 상처가 늘어날수록 무언가에 맞춰지는 우리 마음과도 닮았습니다.

머릿속을 스쳐 지나간 날들이 있습니다. 서둘러 내뱉은 한마디가 누군가의 마음에 움푹 들어갔던 기억, 힘주어 쥐었다가 놓친 관계의 모서리, 해보려다 흘려버린 계획의 자국들. 그런 흔적들이 보일 때마다 숨기고 싶은 마음도 컸습니다. 그런데 도마를 생각하면 마음이 조금 달라집니다. 쓰임을 피하지 못해 남은 상처들이, 다시 무언가를 받아낼 자리로 굳어지는 모습이 떠오릅니다. 오늘의 우리도 그렇게, 하루의 칼끝을 견디며 자신의 모양을 배워가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도마를 씻고 나면 소금을 조금 뿌려 결을 따라 문지르곤 합니다. 거친 알갱이가 미세한 틈 사이로 들어가 오래 남은 냄새를 데려가고, 레몬 조각을 한 번 굴리면 향이 조용히 퍼집니다. 그리고는 세워두면, 습기가 천천히 빠져나갑니다. 눈에 띄지 않는 과정이지만, 그 시간이 지나야 다시 식탁으로 돌아올 수 있습니다. 우리 삶에도 그런 시간이 있었습니다. 누군가 전한 짧은 안부 메시지, 문득 건네받은 따뜻한 국 한 그릇, 끝말을 삼키고 들어주는 침묵, 보이지 않는 데서 올려진 기도. 그 사이로 마음의 습기가 조금씩 비워지고, 곰팡이 대신 향이 남았습니다.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시며, 꺼져가는 등불을 끄지 아니하신다”는 말씀이 불쑥 떠오릅니다(이사야 42:3). 손길이 거칠어 보이지 않는데도, 버리는 대신 살려내는 방식으로 다가오는 사랑이 있었습니다.

밤이 깊어갈수록 부엌은 더 조용해집니다. 식던 냄비 뚜껑이 마지막 열을 놓는 소리가 아주 가끔 ‘톡’ 하고 지나가고, 싱크대 아래에서 물이 먼 데로 흘러가는 소리는 금세 사라집니다. 그 사이로 서 있는 도마가 조용히 마르고 있습니다. 누군가의 식탁에 올라 감사의 자리를 비울 준비를 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마음에도 그런 밤이 있습니다. 소리 없이 스며드는 시간, 무언가가 마르고 가라앉는 동안 비로소 다음 아침을 품을 수 있게 되는 때. 그때 알게 됩니다. 오늘 하루의 칼자국이 내일의 쓰임을 포기하게 하지 않는다는 것을, 상처가 도리어 손에 잡히는 감각이 되어 주기도 한다는 것을.

혹시 지금, 나무결 사이로 남은 향이 조금씩 가벼워지는 것을 느끼신다면, 그 또한 선물처럼 받아들이고 싶습니다. 오늘 밤, 부엌 한켠에서 나무가 마르는 소리 같은 고요를 듣게 되면, 그 침묵 속에 우리를 버티게 하는 손길이 다녀가셨음을 마음이 먼저 알아챌지도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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