녹색 보온병과 초겨울 새벽 빵집 불빛

📅 2025년 08월 16일 07시 00분 발행

초겨울 새벽이면 동네가 아직 푸른빛을 간직한 채 숨을 가라앉히고 있습니다. 첫 차가 한 번 지나가고, 가로수에 얹힌 이슬이 잠깐 반짝입니다. 그 시간, 모퉁이의 작은 빵집 유리 진열장에는 하얗게 김이 서리고, 안쪽에서 은은한 불빛이 반죽의 숨소리를 비춥니다. 저는 오래 쓰던 녹색 보온병을 손에 쥐고 서서, 그 안의 뜨거운 보리차가 손바닥을 데워 주는 느낌을 즐겨 보곤 합니다. 작은 발걸음들이 적막 속에 섞여 들어가고, 제 몸에도 천천히 온기가 퍼집니다.

문틈 사이로 밀가루가 흩날리고, 이스트 냄새가 새어나옵니다. 제빵사가 덩어리 반죽을 들어 올릴 때마다, 시간이 쌓아 올린 결들이 반짝이는 듯합니다. 반죽은 너무 서두르면 찢어지고, 오래 눌러대면 힘을 잃는다고 들었습니다. 그래서 적당한 기다림과 손길 사이에서 그 빵이 비로소 자기 모양을 찾아간다는 말이 마음에 남습니다. 온도와 습도, 사람의 숨결 같은 것들이 모두 어울려 하나의 빵이 되는 순간을 생각하면, 삶도 그런 조율을 매일 조금씩 배우는 일 같아집니다.

유리 너머에서 제빵사는 무심한 듯 단단하게, 그러나 사려 깊은 리듬으로 반죽을 접었다 펴고, 손목에 힘을 싣습니다. 그 손동작이 기도처럼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말을 많이 하지 않아도 마음이 길을 찾는 순간이 있지요. 때로는 조급함이 우리를 이끌고, 마음 한가운데가 허전해지는 날도 있는데, 반죽이 쉼을 얻는 그 짧은 사이를 바라보고 있노라면, 제 안의 어떤 불안도 잠시 자리를 찾는 듯합니다.

진열장 맨 아래칸이 조금씩 맑아지고, 호밀빵이 처음으로 모습을 드러냅니다. 그 겉껍질의 얇은 금이 마치 지난 날의 무늬를 닮았습니다. 어느 날 받아들었던 문장 하나, 오래 지고 있던 이름 하나, 선한 눈빛 하나가 그 금 사이로 스며 있습니다. 성경에 ‘마음이 상한 자에게 가까이 하신다’고 했지요. 그 말씀을 떠올리면, 금이 있다는 사실이 부끄럽지만은 않습니다. 오히려 그 금이 있어 향기가 길을 찾는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문 앞에는 아직 뜯지 않은 주황빛 귤 상자가 놓여 있습니다. 누군가의 후원인지, 아침 장사 준비인지 알 수 없지만, 껍질만 보아도 그 신선함이 기분을 맑게 합니다. 차가운 공기에 살짝 떠는 귤 상자와 따뜻한 빵 냄새 사이에서, 계절이 갈아입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습니다. 겨울 문턱에서 우리는 저마다의 보온병을 쥐고, 자기만의 온기를 확인합니다. 누군가는 기억을 데우고, 누군가는 걱정을 식히고, 누군가는 아직 말하지 못한 마음을 조용히 아랫목으로 옮겨 놓습니다.

반죽이 오븐으로 들어갈 시간이 가까워지자, 제빵사는 시계를 흘끗 보고, 작업대를 정돈합니다. 그 모습이 이상하리만큼 안심이 됩니다. 일의 순서가 흐트러지지 않고, 손과 열과 시간이 서로를 존중하는 풍경은, 사실 우리 일상 어디서든 가능하다는 생각을 불러옵니다. 한숨 쉬고, 한 모금 마시고, 한 줄 적어 두고, 누군가의 이름을 마음속으로 한번 불러 보는 그 작은 순서만으로도, 하루는 조금 다른 표정을 갖곤 합니다.

어느새 보온병의 온기가 절반쯤 남았고, 빵집 안은 구워지는 소리로 가득합니다. 저는 다시 걸음을 떼야 할 시간이라는 걸 압니다. 그렇다고 장면이 끝나는 것은 아니겠지요. 빵 향은 거리로 퍼지고, 사람들은 그 냄새를 따라 자신만의 이른 아침으로 걸어갈 것입니다. 누군가의 식탁에, 누군가의 점심 가방에, 또 누군가의 마음 한켠에 이 따뜻함이 닿을 것입니다. 저는 이 새벽의 불빛이 우리 각자의 마음 속에서도 꺼지지 않고 타고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다만 그 불빛을 알아보는 눈길이 때로 늦어질 뿐이겠지요.

오늘은 유리 진열장에 맺힌 김처럼, 말하지 않아도 드러나는 온기가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고 싶습니다. 급히 판단하지 않고, 서두른 위로 대신 머무는 눈빛 하나를 마음속에 놓아 두고 싶습니다. 반죽이 자기 시간을 건너듯, 우리 마음도 자기 속도로 부풀어 오르는 때가 있습니다. 그 속도를 믿어 보아도 괜찮겠다 싶습니다. 그리고 길을 나서며, 방금 구워 낸 빵처럼 따끈한 하루가 누군가의 손에 조용히 전달되는 장면을 떠올립니다. 그 상상을 품고 걷는 것만으로도, 새벽의 불빛은 충분히 밝아지는 듯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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