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25년 12월 02일 07시 01분 발행
엘리베이터가 점검 중이던 저녁이었습니다. 한층, 또 한층 계단을 오르는데, 콘크리트에 남아 있던 낮의 먼지 냄새가 발끝에 따라 붙었습니다. 계단참마다 누군가의 소포가 조용히 머물고, 내일 버릴 상자에 적힌 작은 글씨들이 흘러간 하루의 뒷모습을 말해 주는 듯했습니다. 그 사이사이, 늘 그 자리에 있던 초록빛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달리는 사람의 그림이 새겨진 비상구 표지. 누구도 유심히 보지 않지만, 밤에도 낮에도 꺼지지 않는 그 빛이 길의 방향을 잊지 않게 하고 있었습니다.
그 빛은 환대처럼 조용합니다. 필요할 때만 눈에 띄는 것이 아니라, 필요가 없는 시간에도 쉬지 않습니다. 강한 햇빛 아래서도, 전깃불이 드문 계단참에서도 변함없이 같은 온도로 서 있습니다. 박수 받을 일도 없고, 칭찬을 요구하지도 않는 한 가지 일을 묵묵히 계속합니다. 무언가가 크게 해결되는 순간보다, 그저 길을 잃지 않게 붙잡아 주는 작은 표지가 사람을 살리는 때가 있습니다.
삶에는 비상구가 필요하다는 생각을 종종 하게 됩니다. 숨이 차오르는 날, 머릿속이 막히는 밤, 말들이 서로 엇갈려 엉켜 버린 저녁. 그때마다 화려한 답은 잘 보이지 않고, 초록빛처럼 간신히 확인되는 작은 출구가 떠오릅니다. 따뜻한 물 한 잔을 들고 창가에 서서 숨을 고르는 일, 오래 못 본 이름을 조심스럽게 떠올리며 안부를 속으로 건네는 일, 낡아 빠진 찬송 한 구절을 낮게 흥얼거리는 일. 낯익은 것들이지만, 그 순간만큼은 삶의 방향을 다시 정렬해 주는 표지처럼 보입니다.
성경은 때때로 이런 초록빛을 떠올리게 합니다. “너희가 오른쪽으로 치우치든지 왼쪽으로 치우치든지 네 귀에는 뒤에서 말하는 소리가 들리리니 ‘이것이 바른 길이니 이리로 가라’ 할 것이며.” 길을 가르치는 그 목소리는 번개처럼 번쩍이지 않고, 뒤에서, 귀에, 조용히 다가온다 했습니다. 계단참의 비상등처럼, 가까이에 있었는데 이제야 보이는 방식으로 말입니다.
사람의 마음에도 비상구가 마련되어 있다는 믿음을 떠올립니다. 도망치자는 뜻이 아니라, 숨을 이어 가기 위한 통로가 있다는 뜻입니다. 그 통로는 늘 화려하지 않습니다. 손잡이가 느슨한 컵에서 올라오는 김, 식탁 위에 남은 연필 자국, 제 시간에 울리는 약 봉지의 사각거림, 우편함에 꽂힌 얇은 엽서 한 장. 사소해 보이는 것들이 어느 날 갑자기 초록빛으로 보일 때가 있습니다. 거기로 발걸음을 옮기다 보면, 해결은 아직 멀어도 막막함은 조금씩 풀립니다.
계단을 다 오르자 숨이 넓어지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오늘의 무게가 사라진 것은 아니었지만, 어느 방향으로 몸을 두어야 하는지는 알겠습니다. 문 손잡이를 잡던 손에 아직 남아 있는 초록빛의 잔광이, 마음의 안쪽에도 비슷한 온도로 남는 듯했습니다. 내일도 그 빛은 계단참에서 쉬지 않을 것입니다. 필요한 순간이 오든 오지 않든, 제 자리를 지키며 같은 표정을 하고 있을 것입니다. 생각해 보면, 사랑도 그런 모양을 하고 있었습니다. 늘 켜져 있지만, 막다른 골목에서야 가장 선명해지는 빛. 그게 우리를 집으로 데려다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