늦은 빨래방의 둥근 빛

📅 2025년 09월 26일 07시 01분 발행

골목 끝 빨래방 불이 아직 꺼지지 않은 밤이었습니다. 유리문을 통과하자 따뜻한 습기가 눈썹에 붙었고, 회색 드럼이 둥근 눈을 뜬 채로 천천히 돌고 있었습니다. 드럼 창 너머로 하얀 거품이 어스름하게 떠오르고 꺼지기를 반복했고, 불빛이 물결에 부딪혀 작은 별들처럼 반짝였습니다. 바닥 타일에는 물방울이 군데군데 맺혀, 오늘 하루의 발자국들이 잠시 쉬어가는 듯했습니다.

한쪽 의자에는 누군가 벗어둔 니트 가디건이 반듯하게 접혀 있었고, 계산대 옆에는 동전 교환기의 딸깍 소리가 드물게 들렸습니다. 건조기 앞에 놓인 바구니에는 짝을 잃은 양말 한 짝이 고요히 누워 있었는데, 누구의 것이었는지 아무도 모르는 표정이었습니다. 사람들의 이야기와 시간이, 천과 실에 스며든 채 여기로 모여드는 것 같았습니다. 오늘 하루 흘린 말들, 삼킨 말들, 마음에 남은 자국들이 저 드럼 속에서 빙글빙글 풀리는 동안, 저는 그 자리를 떠나지 못했습니다.

물과 거품이 휘돌 때마다, 안에서 무언가가 살짝 내려앉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어떤 상념은 거품처럼 부풀었다가, 조금 지나니 자연스레 꺼졌습니다. 붙잡고 있던 결은 물결에 눕고, 서둘러 접어 넣었던 마음의 구김은 조금씩 펴졌습니다. 빨래가 되는 동안 하는 일이라곤 기다리는 것뿐인데, 그 기다림이 이상하게도 누군가의 손길을 닮아 있었습니다. 손으로 비비지도 않고, 크게 흔들지도 않는데, 오래 가까이 머물러 있기만 해도 부드러워지는 것들이 있습니다.

한동안 드럼의 빛을 바라보다가, 오래 묵은 얼룩에 대해 생각했습니다. 아무리 빨아도 흔적이 남는 부분이 있지요. 애써 숨겨 보지만 햇빛 아래서 다시 떠오르는 색. 그 자리에는 부끄러움과 체념이 교차하지만, 그조차 우리의 삶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완벽히 지워지지 않은 흔적 때문에 우리는 서로를 알아보게 되곤 합니다. 그 자리에 손을 얹어 조용히 고개를 끄덕여주는 사람이 가까운 사람임을, 나이가 들수록 더 알게 됩니다.

성경에는 상한 갈대를 꺾지 않으시고 꺼져 가는 심지를 끄지 않으신다는 말씀이 있습니다. 오늘 밤 제 눈에는, 거품 속에서 비로소 숨을 고르는 천 조각들이 그 구절의 작은 설명처럼 보였습니다. 힘을 주어 잡아당기면 더 상할 뿐인데, 기다려 주면 제 모양을 되찾는 직물이 있듯이, 하나님께 고개를 들면 그 기다림이 먼저 와 있었음을 문득 깨닫게 됩니다. 우리가 서둘러 해명하지 못한 말과, 이유 없이 울컥한 감정들, 설명할 수 없어 더 서러운 밤까지도 그 기다림 속에서는 자리를 얻는 것 같습니다.

빨래가 마무리될 즈음, 드럼 유리창에 맺힌 물방울이 하나 둘 흘러내렸습니다. 흘러내린 길 위로 잔잔한 빛이 번졌고, 그 빛이 마치 오늘의 후회를 조용히 건너가는 작은 다리처럼 보였습니다. 건조기의 둥근 열이 마지막으로 남은 수분을 데려가자, 천 사이사이에 숨은 따뜻함이 돌아왔습니다. 삶도 어쩌면 이렇게, 한 번쯤은 젖어야 비로소 품을 수 있는 온기를 얻는지 모르겠습니다.

바구니에 갓 마른 수건을 얹으며 생각했습니다. 하루를 잘 살았다는 확신은 대개 큰 사건에서 오지 않더군요. 누군가의 이름을 천천히 불러보고, 목 뒤에 얹힌 작은 먼지를 털어주고, 자기 마음에 묵혀 둔 말 하나를 가만히 다독이는 그 미세한 순간들에서 오곤 했습니다. 오늘의 슬픔도 그 미세함 속에서 방향을 바꾸며, 아직 꺼지지 않은 불빛처럼 작게 남아 주었습니다.

문을 나서자 밤공기의 서늘함이 이마에 닿았습니다. 팔에 든 바구니가 조금 무거웠지만, 안쪽에서는 부드러운 냄새가 났습니다. 세상에 들고 나갈 무엇이 이렇게 따뜻할 때가 있습니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 회전하던 둥근 빛이 눈 안쪽에 오래 남았습니다. 그 빛이 오늘 밤 우리 각자의 마음에도, 조용히 한 겹 깔려 있기를 바랍니다. 언젠가 다시 묵은 얼룩이 드러나더라도, 이 온기를 기억할 수 있을 만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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