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이얼을 천천히 돌리며

📅 2026년 07월 08일 07시 01분 발행

장마가 길어지는 밤입니다. 부엌 타일에는 하루 종일 날아든 물기 자국이 반짝이고, 선반 위 컵들은 눅눅한 공기를 조금씩 머금고 서 있습니다. 선풍기 날개가 공기를 부드럽게 가르며 지나갈 때마다 냄비 뚜껑이 가볍게 떨립니다. 이런 밤이면, 마음도 어디선가 촉촉해진 듯 느껴집니다. 말로는 설명되지 않지만, 오래된 생각 몇 개가 표면으로 떠오르는 시간이지요.

서랍 깊숙이 넣어 두었던 작은 라디오를 꺼내 보았습니다. 전원을 켜자 먼저 들리는 건 음악이 아니라 사각사각한 잡음입니다. 붉은 표시등이 조용히 켜지고, 손끝이 다이얼을 아주 조금씩 밀어 봅니다. 주파수가 꼭 맞을 듯 말 듯, 단어 몇 개가 흘렀다가, 다시 모래알처럼 흩어집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그 불완전함 사이에서 오히려 누군가가 여기까지 도달하려고 애쓰고 있구나 하는 느낌이 듭니다.

신앙이 하루와 만나는 자리도 이와 비슷한 때가 있지요. 소식들은 크고 빠르며, 걱정은 채널을 바꾸듯 잦습니다. 할 일 목록의 소리, 문자 알림의 소리, 마음속 오래된 한숨의 소리가 겹쳐집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주 잠깐, 단정한 음절 몇 개가 우리 안에 흘러들어올 때가 있습니다. 그 순간은 설명하기 어렵지만, 마치 다이얼이 정확한 칸을 살짝 스쳤다가 멈춘 것처럼 선명합니다.

하나님의 위로도 거대한 확성기보다 가느다란 신호로 다가오는 때가 많습니다. “너희는 가만히 있어 내가 하나님 됨을 알지어다”(시편 46:10). 폭우처럼 쏟아지는 말들 사이에서 이 한 줄은 빛나는 필름처럼 얇고 투명합니다. 그러나 얇다고 약한 것은 아니지요. 금속 안테나를 길게 뽑아 올릴 때 손끝으로 전류가 스미는 것처럼, 미세하지만 분명한 힘이 전해집니다.

사람 사이의 마음도 주파수를 맞추는 일과 닮았습니다. 누군가의 하루는 외로웠다는 말을 차마 하지 못하고, 저녁 식탁 위 그릇 소리를 조금 크게 냅니다. 어떤 고백은 문장 앞이 아니라 마지막 한두 단어에 숨어 있습니다. 말의 볼륨이 아니라 간격과 쉼표에서 마음의 온도가 전해집니다. 그 간격을 허락해 주는 눈빛을 만날 때, 우리는 비로소 서로를 잘 들었다고 말할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라디오를 책장 위로 올려 두고 안테나를 더 뽑아 보았습니다. 방 안 공기가 달라지는 건 아닌데, 소리가 갑자기 또렷해지는 지점이 있었습니다. 아마도 우리 삶에도 그런 높낮이가 있겠지요. 단정히 걷던 걸음을 잠시 늦추는 순간, 해답을 찾기보다 질문을 그대로 놓아두는 밤, 해명 대신 손을 포개어 주는 침묵. 그 미세한 높낮이에서 신호가 붙잡히곤 합니다.

이 밤에 들려온 노래 한 구절이 오래 남습니다. “괜찮다”는 말보다 작고, “사랑한다”는 말보다 길게 들리는 소리. 우리의 다이얼이 오늘보다 반 칸 더 고요해졌으면 좋겠습니다. 그래서 내일 아침, 컵에 맺힌 물방울이 천천히 흘러내리듯, 마음 안에서도 작은 멜로디가 스스로 흐르는 것을 느껴 보실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잡음이 완전히 사라지지 않아도, 그 사이로 오는 목소리는 길을 찾아옵니다. 그리고 그 길을 따라 우리는 다시 하루를 걸어가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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