둥근 유리문 속에서 풀리는 하루

📅 2025년 11월 12일 07시 02분 발행

동네 빨래방의 새벽은 늘 조금 느립니다. 천장의 불빛이 먼저 깨어나고, 금속의 표면을 따라 미세한 떨림이 퍼집니다. 동전이 투입구를 지나 미끄러질 때 나는 소리가 짧게 울리고, 건조기의 붉은 숫자들은 38, 37, 36… 천천히 내려갑니다. 둥근 유리문 안에서는 수건과 셔츠가 엉켰다가 풀리고, 얇은 김이 표면에 붙었다가 사라지기를 되풀이합니다. 겨우 몇 발자국의 거리인데도 그 안과 밖은 다른 시간처럼 흐릅니다.

한쪽 벤치에 앉아 있으면 생각이 살짝 갈피를 잡습니다. 오늘의 대화 중에 마무리되지 못한 한두 마디, 마음 어딘가에 남은 습기처럼 자꾸만 손이 가는 기억, 돌아와야 하는 집의 고요. 건조기의 둥근 드럼 벽면에는 작은 구멍들이 촘촘히 뚫려 있습니다. 따뜻한 공기가 그 구멍들을 스치며 섬유 사이에 숨어 있던 물기를 데려갑니다. 우리에게도 그런 구멍들이 있음을 떠올려 봅니다. 겉으론 멀쩡해 보이는 표정 사이사이에, 말끝마다 스며 있는 미세한 피로. 누군가의 균일한 온기에 오래 머물면, 말없이 줄어드는 것들이 있었습니다.

회전은 반복처럼 보이지만, 같은 자리에 머무는 일은 아니었습니다. 어제와 다를 것 하나 없어 보이는 오늘이, 내부에선 조금씩 가벼워지고 있었습니다. 기다림은 종종 낭비로 여겨지지만, 변화는 주로 안쪽에서 일어납니다. 멀미처럼 요란하지 않고, 건조기의 유리문 위에 생겼다 사라지는 김처럼 조용하게.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이 약속은 소란스러운 해결보다 온도의 언어로 다가옵니다. 무거운 것을 당장 들어 올려주는 대신, 짐이 손에서 미끄러져 나오도록 손바닥을 따뜻하게 해주는 방식으로.

숫자는 계속 줄어듭니다. 정적 속에서 카트 바퀴가 한 번 덜컥 소리를 내고, 벽시계 초침이 제 할 일을 잊지 않는 듯 움직입니다. 문이 열리는 순간, 둥근 안쪽에서 뜨거운 향이 밀려 나옵니다. 아직 조금 덜 마른 소매 끝을 손가락으로 눌러 보다가, 다시 시간을 더합니다. 우리 삶도 가끔은 이렇게 한 번 더 돌려야 했습니다. 충분히 견디고, 충분히 식고, 다시 따뜻해지기까지.

접는 시간은 마음을 정리하는 시간과 닮았습니다. 모서리를 맞추고, 겹을 살피고, 같은 것끼리 가지런히 얹습니다. 종종 짝을 잃은 양말이 있습니다. 한참을 뒤적이다가 숨어 있던 짝을 찾는 순간, 괜히 안도하게 됩니다. 떠난 줄 알았던 것이 사실은 안쪽에서 돌고 있었던 것처럼, 잃어버렸다고 생각했던 마음의 결도 이런 자리에 남아 있었습니다.

유리문을 닫고 밖으로 나오는 길, 새벽의 공기는 아직 말을 아끼고 있습니다. 손에 든 빨래의 온기가 팔에 스밉니다. 누구에게도 설명하지 않아도 되는 온기입니다. 오늘도 하루가 한 바퀴 돌아갈 것입니다. 같은 모습으로 반복되는 듯해도, 우리 안의 물기 하나가 더 가벼워질지 모릅니다. 서랍 속 빈 칸을 마련하듯 마음에도 자리가 생기고, 그 자리에 오늘의 따뜻함이 조용히 들어앉습니다. 그렇게, 아직 말리지 못한 이름들을 품은 채로, 다음 회전이 시작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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