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페 아래, 우리의 때

📅 2025년 10월 29일 07시 02분 발행

낮인지 저녁인지 분간이 흐려지는 지하상가를 걷다가, 유리 진열장만 반듯이 빛나던 작은 시계수리점을 만났습니다. 금속과 가죽이 뒤섞인 묵직한 냄새, 오래된 숫자판의 바랜 야광, 틈새를 메우듯 포개진 시곗줄들. 스탠드등 하나가 하얗게 테이블을 밝히고, 주인 어르신은 눈에 작은 돋보기를 끼운 채 조용히 숨을 고르듯 손을 움직이고 계셨습니다.

내 시계의 초침이 어느 날 문득 멈춘 뒤로, 시간은 계속 가는데 손목만 고요한 그 느낌이 조금 어색했습니다. 어르신이 뒤판을 조심스럽게 열자, 아주 얇은 고무링 하나가 드러났습니다. 핀셋 끝에 걸린 그 고무링은 어떤 날의 마음처럼 쉽게 늘어난 채로, 제 역할을 잃고 있었습니다. 배터리를 바꾸고, 닳은 패킹을 새 것으로 갈아 끼우자 어르신이 고갯짓으로 스탠드등을 더 가까이 당겼습니다. 그 순간, 거의 들리지 않던 소리들이 하나의 합주처럼 살아났습니다. 가게 안에 모여 있는 수십 개의 시계들이 서로 다른 박자로 토닥토닥 웃습니다. 초침 하나를 살려내는 일에 이처럼 많은 손길과 빛과 침묵이 필요하다는 것을, 그때 처음 또렷이 보았습니다.

어르신은 말수가 적었지만, “이 아이들은 스스로 울지 않으면 멈추지요”라고 중얼거렸습니다. 스스로 우는 법, 다시 움직이는 법. 나도 내 안의 어떤 초침이 멈춰 있었구나 싶었습니다. 겉으로는 분주했지만, 중심에 물이 스며들어 정확을 잃고, 그 사실을 알면서도 그냥 두었던 시간들이 떠올랐습니다. 작은 패킹 하나가 새어 나온 물길을 막아 주듯, 우리 삶에도 그런 얇고도 중요한 고리가 있음을 생각합니다. 하루의 처음에 놓는 짧은 기도, 누구에게 건네는 고맙다는 말, 식탁 위를 함께 정돈하는 손길. 눈으로 보기엔 사소하지만, 그것들이 우리 시간을 지켜 주고, 마음의 안쪽을 건조하게 해 주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시곗바늘이 다시 뛰기 시작하자, 주머니 속 동전보다 마음이 먼저 가벼워졌습니다. 뒤판을 닫는 마지막 ‘딸깍’ 소리 뒤에, 내 얼굴이 반사되어 잠깐 흔들렸습니다. 그 작은 금속 표면에 오늘의 내가 비치고, 곧 사라졌습니다. 시간은 그렇게 손끝을 스쳐 지나가지만, 그 속에서 우리를 붙들고 계신 손이 있다는 고백을 더듬어 봅니다. “나의 때가 주의 손에 있사오니”(시편 31:15). 손목에서 느껴지는 미세한 진동이 그 말의 확인처럼 다가왔습니다.

생각해 보면, 멈춤은 언제나 실패의 이름만은 아니었습니다. 무심히 지나온 과속을 식히고, 보이지 않던 먼지를 털어 내고, 새 고무링을 끼워 마음의 방수를 다시 시작하는 시간이기도 했습니다. 스탠드등 아래에서 시계를 맡기고 서 있던 그 몇 분이, 하루를 다르게 걷게 하는 시작이 되었습니다. 우리 각자의 내부에서 다시 ‘딸깍’ 하는 소리가 나기까지, 서둘러 증명할 것도, 조급히 달려갈 이유도 많지 않다는 것을 배웁니다. 빛이 필요한 자리에 빛을 들이고, 손길이 필요한 곳에 조용한 손을 얹을 수 있다면, 그 다음 초는 저절로 앞으로 나아갈 테지요.

지하상가를 나오자 위의 세계는 여전히 바쁘게 흘렀습니다. 그러나 손목 위에서 귓바퀴로 전해지는 작은 박동은, 누구도 대신해 줄 수 없는 나의 리듬을 알려 주었습니다. 오늘의 우리에게도 그런 루페 하나가 있기를, 작고 정확한 시선으로 지금의 마음을 들여다볼 수 있기를. 그리고 언젠가처럼, 꼭 필요한 순간에 꼭 필요한 ‘딸깍’이 들리기를. 그 소리를 따라, 우리 각자의 때가 조용히 제 자리를 찾아갈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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