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듭 사이로 스미는 빛

📅 2026년 10월 03일 07시 00분 발행

교회 지하 창고 문을 열면 종이와 천, 오래된 나무 상자의 냄새가 먼저 반겨 줍니다. 계절은 아직 서늘함을 다 꺼내지 않았는데, 손길은 벌써 성탄 상자를 더듬게 되었습니다. 손글씨로 ‘전구’라 적힌 상자를 열자 검은 선들이 둥근 고리들을 만들며 서로를 꼭 붙들고 있었습니다. 누가 일부러 묶어 둔 것도 아닌데, 지난 해의 서둘렀던 마음과 성급한 정리가 이 작은 매듭들을 남겼나 봅니다.

전구 한 줄을 조심스레 들어 올리니, 유리 구슬 같은 불씨들이 반짝임 대신 묵묵히 서로를 잡아 끌고 있었습니다. 끝을 찾는 일은 늘 작은 인내를 청합니다. 한 손으로 줄을 받쳐 들고, 다른 손으로 꼬여 있는 고리를 느슨하게 밀어 냅니다. 손바닥의 온기가 고무 피복을 조금 부드럽게 만들고, 먼지가 묻은 전구를 손등으로 살짝 문지르면 흐릿한 제 얼굴이 둥근 유리 안쪽으로 겹쳐 보였습니다. 사각사각, 거의 듣히지 않는 소리로 매듭 하나가 풀릴 때, 제 안에서도 어디선가 조용히 숨을 고르는 기척이 납니다.

사람 사이의 일도 이와 비슷한 모양을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별일 아닌 말 한 마디가 다른 말에 걸려, 시간 속에서 단단해집니다. 미처 전하지 못한 안부, 조금 늦은 고백, 내 쪽의 자존심이 만든 이음새들. 누구의 탓이라 하기 어려운, 그렇다고 놔두기엔 불편한 그 얽힘이 어느새 마음을 무겁게 하지요. 풀리기 시작하면 별것 아니었던 것들이, 풀기 전까지는 그 작은 매듭이 늘 큰 그림을 가립니다.

콘센트에 전구를 잠깐 꽂아 보았습니다. 이어지다 끊기는 빛, 다시 이어지는 희미한 반짝임. 아직 남은 매듭이 있다는 신호였습니다. 어둔 창고의 천장 가까이에 작은 원들이 서너 개 떠올라, 아직 서늘한 공기를 살짝 데웁니다. 불빛은 크지 않았지만, 그 작은 빛만으로도 바닥의 자국들이 선명해지고 손길이 가야 할 길이 보였습니다. 사람 마음도 이와 비슷해서, 모든 답이 한 번에 빛나지 않아도, 한 점의 밝혀진 자리만으로 다음 한 걸음의 자리를 알게 되는 듯합니다.

줄을 풀며 ‘사랑은 오래 참고’(고린도전서 13:4)라는 말을 떠올렸습니다. 오래 참는다는 것은 멀리서 구경하는 인내가 아니라, 바로 곁을 오래 내어 주는 일 같았습니다. 누군가의 난처함 곁에 서서 재촉하지 않고, 제 방식으로 얼른 해결하려 하지 않고, 손의 온기로만 가능한 속도로만 매듭을 만지는 일 말입니다. 그렇게 붙들고 서 있는 동안, 묵은 단단함 속에서도 어느 결 하나가 스스로 길을 열어 준다는 사실을 자주 보았습니다.

전구 하나가 켜질 때마다 방의 결이 조금 달라집니다. 반짝임이 연속이 되면 화려해지지만, 그 전에 찾아오는 간헐적 빛의 틈이 더 오래 기억에 남습니다. 저도 가끔은 모든 일을 단번에 밝히고 싶어지곤 합니다. 그러나 오늘 같은 오후에는, 불이 들어오는 순서가 제 마음의 속도를 가르쳐 주었습니다. 성급함이 약속해 주는 것은 대개 금세 흐려지고, 기다림이 남기는 것은 오랫동안 따뜻했습니다.

모든 매듭이 다 풀리지 않아도, 이미 풀려 난 부분을 따라 빛이 스며듭니다. 누구에게는 안부 한 줄이, 누구에게는 사과 한 마디가, 또 누구에게는 내버려 두었던 이름 하나를 조용히 불러 보는 일이 그 시작이겠지요. 말이 닿기 전에 먼저 마음이 닿는 순간, 전구 속 가는 필라멘트가 미약한 불씨를 얻듯, 우리 안에서도 작은 환함이 일어나는 것을 느낍니다.

상자를 덮기 전, 한 번 더 불을 켜 보았습니다. 이제는 끊김 없이 잔잔하게 이어지는 빛이 창고 안의 물건들을 제자리로 돌려놓게 했습니다. 기다림이라는 길은 눈에 잘 보이지 않지만, 그 길 위에서만 만날 수 있는 표정이 있습니다. 오늘 하루도 누군가의 얽힌 자리 곁에 서서, 제 손의 온기를 조금 더 오래 나누고 싶어졌습니다. 그 마음만으로도 어둠은 이미 한 걸음 물러난 듯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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