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25년 11월 11일 07시 02분 발행
평일 오후, 골목 끝 작은 제본소에 들른 적이 있습니다. 문을 여니 본드의 달큰한 냄새와 면실의 보송한 감촉이 공기 속에 얹혀 있었습니다. 낡은 표지들이 낮은 더미를 이루고, 금빛 가는 자가 햇빛을 받아 길게 누워 있었습니다. 사장님은 해어진 책등을 손바닥으로 한 번 쓸어 내리고는, 느긋한 호흡으로 떨어져 나간 장을 모아 순서를 가다듬으셨지요. 실이 바늘귀에 끼워지는 순간, 작은 숨이 한 번 더 고르게 들려왔습니다.
제본은 화려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듯 보였습니다. 그러나 안쪽에서는 조용한 일이 벌어지고 있었습니다. 들뜬 종이의 가장자리에 본드를 얇게 펴 바르고, 실이 종잇장 사이를 통과해 매듭을 남깁니다. 그 매듭은 밖으로 드러나지 않지만, 바로 그 감춰진 매듭이 책을 붙들어 줍니다. 책등의 작은 홈이 있어야 책이 평평하게 펼쳐지듯, 우리의 굴곡도 때로는 마음을 더 넓게 열게 합니다. 상처 자국이 경직이 아니라 경첩이 되는 순간을, 그 조용한 손끝에서 배웠습니다.
하루를 떠올리면, 떨어져 나간 장들처럼 보이는 순간이 있습니다. 말하려다 삼킨 문장, 어쩌다 놓친 약속, 곧 사라진 미소. 그러고 보면 삶은 빈틈 없이 이어지는 띠지가 아니라, 간신히 묶인 페이지들의 모임 같습니다. 그런데 이상하지요. 어느 결에 누군가의 안부가 들려오고, 저녁 냄비에서 오르는 수분이 방 안에 머물고, 잠깐 들여다본 오래된 사진 한 장이 자리를 만들어 줍니다. 흩어진 순간들이 서로의 모서리를 맞추며 제 자리를 찾아가는 일, 그 보이지 않는 일을 하나님께서 다정하게 하십니다. “나의 형질이 이루어지기 전에 주의 책에 다 기록되었나이다”(시편 139편). 우리에게는 흩어짐처럼 보일 뿐인데, 주님께는 기록과 연결의 시간이었을지 모르겠습니다.
프레스 기계가 책을 눌러 주는 동안, 사장님은 다른 일을 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냥 기다리셨지요. 눌림과 기다림, 그 사이로 형태가 생깁니다. 본드가 마르려면 서두름을 내려놓아야 하고, 실이 숨을 고르려면 침묵이 필요합니다. 생각해 보면 우리 하루도 그렇습니다. 무언가를 더 보태기보다, 이미 붙어 있는 것들이 굳어지도록 잠시 맡겨 두는 시간이 있어야 합니다. 그 시간이 쓸쓸하지 않도록, 하나님은 타인의 목소리 하나, 창가에 넘어오는 빛 한 줌, 식탁 위에 놓인 수저의 은빛 같은 자잘한 기쁨을 흘려 보내십니다.
다시 묶인 책을 받아 들었을 때, 손에 남는 건 무게가 아니라 정리된 숨이었습니다. 페이지마다 끝자락이 가지런하고, 펼칠수록 더 잘 펼쳐지는 그 느낌. 우리 마음도 언젠가 이런 상태를 기억해 낼 것입니다. 돌이킬 수 없는 날들이 모여 돌려 읽을 수 있는 이야기가 되고, 겉으로 보이지 않는 매듭들이 안쪽에서 서로를 붙잡아 주는 상태. 오늘의 끝에서 손을 펴 보면, 그 매끈한 책등 같은 감촉이 잠깐 스치고 지나갈지 모릅니다. 그 스침만으로도 충분하다는 것을, 조용한 제본소의 오후가 알려 주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