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26년 02월 17일 07시 01분 발행
비에 젖은 초저녁, 동네 도서관 벽면에 박힌 반납함이 고요히 입을 열고 있었습니다. 금속 투입구의 가장자리에는 낮 동안 닿았던 손들의 온기가 가느다란 얼룩처럼 남아 있었지요. 책 한 권을 밀어 넣으면, 서늘한 철판을 스치는 종이의 숨소리 뒤로 ‘툭’ 하고 울리는 둔탁한 울림이 따라옵니다. 반납함 속 카트에 부딪혀 멈춰 선 그 소리는, 오늘이라는 문장 끝에 찍히는 작은 마침표처럼 느껴졌습니다.
우리는 하루 내내 여러 권의 사적인 책을 품고 다니곤 합니다. 처리하지 못한 용무의 페이지, 말끝을 놓쳐 버린 인사의 빈칸, 서둘러 넘겨 본 기쁨과 늘 접어 두는 근심의 귀퉁이. 가방에 오래 넣어 둘수록 무게는 가벼워지지 않더군요. 도서관 문이 닫힌 밤에도 반납함은 열려 있듯, 때로는 사람의 시간이 멈춘 뒤에야 비로소 마음의 시간이 흐르기도 합니다. 손에서 떠난 책처럼, 내 안에서 더 이상 품고 있어도 도움이 되지 않는 것들을 제자리로 돌려보낼 때가 있지요.
가끔은 연체료가 붙습니다. 아주 크진 않지만, ‘조금 늦었습니다’라는 사실이 전표처럼 마음에 남습니다. 후회와 자책은 작은 동전 소리로 서로를 깨우고, 우리는 지갑을 더듬듯 변명과 설명을 찾곤 합니다. 그런데 창구 너머의 사서는 종종 말없이 고개를 끄덕여 주고, 도장을 하나 ‘탁’ 찍어 줍니다. 다 끝났다는 표시. 우리 역시 그런 표식을 기다리고 있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시편의 한 구절처럼 “네 짐을 여호와께 맡기라, 그가 너를 붙드시고”(시 55:22)라는 말이 오늘 밤엔 유난히 가까이 다가옵니다. 맡긴다는 말 속에는 미루던 손을 조심스레 놓는 동작이 들어 있지요.
반납함 안쪽에서 카트는 묵묵히 책들을 받아 모읍니다. 제각기 다른 두께와 흔적을 지닌 책등들이 서로 기대어 서고, 내일 아침 누군가는 그것들을 다시 서가에 올려둘 것입니다. 어둠 속에서 정돈되는 일들이 세상엔 참 많습니다. 눈앞에서 확인할 수 없는데도, 알아차리지 못한 사이 제자리를 찾아가는 것들. 마음의 일도 그럴 때가 있습니다. 내 안의 문장이 아직 어수선해 보여도, 보이지 않는 손길이 쉼표를 맞추고 여백을 열어 두는 밤이 있습니다.
넘겨 다닌 페이지의 모서리가 닳고, 중간중간 접힌 자국이 남아 있을지라도 그것이야말로 누군가가 성실히 읽어 낸 흔적이겠지요. 우리의 하루 또한 그렇습니다. 오늘을 살아낸 주름과 얼룩은 실패의 증거라기보다 지나는 발걸음의 기록에 가깝습니다. 다만 그중에는 마음속에 간직할 한 줄도 있습니다. 길을 건네주던 미소, 예상치 못한 안부, 스스로를 다독이던 작은 호흡 하나. 다시 꺼내 읽고 싶은 문장은 가방 깊숙이 넣어 두어도 괜찮겠습니다.
문득, 반납함에 떨어지는 소리를 떠올려 봅니다. 과하게 요란하지도, 감정을 흔들어 놓지도 않는 그 소리. ‘여기까지’라고 말하는 정직한 무게. 그 뒤에 오는 짧은 고요 속에서, 오늘의 손에 쥔 것과 내일로 넘길 것을 가르는 경계가 자연스레 드러나는 듯합니다. 누구도 보지 않는 밤의 창구에서, 마음은 종종 더 선명해지지요. 그렇게 한 번씩, 우리도 제자리로 돌아갈 준비를 마칩니다.
이 밤이 깊어 갈수록, 보이지 않는 서가 어디쯤에서 당신의 하루가 천천히 꽂히는 장면이 그려집니다. 손때 묻은 표지, 이름 없는 위로의 도장 하나. 툭, 하고 내려놓는 소리 다음에 찾아오는 숨 고르기 같은 평온을 오늘은 오래 듣게 되실지도 모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