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25년 11월 14일 07시 01분 발행
늦은 저녁, 동네 도서관의 불이 하나둘 사그라질 무렵, 건물 밖 작은 금속 상자 앞에 서게 됩니다. 반납함이라 이름 붙은 상자는 하루 종일 많은 손들이 건네준 이야기들을 조용히 받아 삼키지요. 차가운 손잡이에 손끝이 닿을 때 금속의 냄새가 묻어납니다. 책을 넣으면 짧은 경첩 소리 뒤로 둔탁한 턱 소리가 울립니다. 그 소리가 오늘의 끝을 알려주는 종소리처럼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책 사이에 끼워 두었던 얇은 영수증이 미끄러져 내려가고, 누군가 남겨 둔 작은 접힌 모서리가 눈에 들어옵니다. 그 밑줄과 흔적들이 낯선 이의 시간을 살짝 보여 주지요. 우리는 다만 잠시 빌려 읽고, 때가 오면 돌려줍니다. 읽다가 멈춘 페이지가 아쉬워도, 다시 가방에 넣어 두었던 무게가 익숙해져도, 제자리로 돌아가야 할 때가 있습니다.
사실 우리 마음속에도 반납함이 하나쯤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합니다. 오래 쥐고 있던 말, 미처 풀지 못한 표정, 손끝에서 미끄러진 약속. 가방 안에서 모서리가 구겨지는 책처럼, 품 안에서 오래 굳어 버린 감정들이 있습니다. 내일 꼭 꺼내 보겠다고 미루다 보면 어느새 연체료가 붙은 것처럼 마음이 조용히 빚을 지지요. 그럴 때 떠오르는 말씀 하나가 있습니다. 마태복음 11장 28절,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진 이들을 쉬게 하시겠다는 그 약속. 주님 앞의 반납함은 새벽에도 열려 있고, 밤늦게 도착한 사연에도 문이 닫히지 않습니다.
사서들은 반납된 책을 받아 흠집을 탓하기보다 제자리를 찾아 줍니다. 제자리에 놓인 책은 다시 누군가의 손으로 건너갑니다. 저는 주님이 우리의 하루를 그렇게 받아 주신다고 믿습니다. 정돈되지 않은 마음, 얼룩이 묻은 말, 깊게 접힌 후회. 그분의 조용한 손길이 그것들을 제자리에 돌려놓아 주시겠지요. 우리가 놓아 보낸 자리에는 숨이 조금 가벼워지고, 그 빈칸에 내일의 문장이 적힐 여백이 생깁니다.
반납함 앞에 서 있으면, 오늘 제가 읽다 만 구절들이 떠오릅니다. 누군가에게 건네려다 멈춘 안부, 훌쩍 지나친 작은 친절, 마음속에서만 고개를 끄덕인 감사. 이 모든 것을 종이 없는 쪽지처럼 하나님께 맡겨 드린다는 생각을 해 봅니다. 잘하지 못한 날도, 너무 잘하려다 굳어 버린 날도, 결국은 그분의 서가로 돌아가 정돈될 것이라는 믿음 말입니다.
가로등 아래 책등이 장갑 사이를 빠져나갈 때, 잠깐의 공백이 생깁니다. 소리가 멈춘 그 사이로 한숨이 풀립니다. 오늘의 문장을 닫아 두고 나면, 내일의 첫 문장을 너무 서둘러 쓰지 않아도 되겠습니다. 도서관은 아침이면 다시 문을 열 것이고, 누군가는 제가 놓고 간 이야기의 이어짐을 펼쳐 볼 것입니다. 우리의 하루도 그렇게 서로의 손을 거쳐 이어집니다. 돌아서는 발걸음이 가벼워지는 순간, 마음속 서랍 하나가 살짝 닫히는 느낌이 남습니다. 그 감각이 오늘 밤을 지켜 줄 듯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