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납함 앞에서

📅 2026년 02월 07일 07시 01분 발행

늦은 오후, 동네 도서관 유리문 손잡이는 낮의 온기를 조금 품고 있었습니다. 손소독제 향이 희미하게 남아 있고, 반납함 입구에는 검은 고무 패드가 말없이 자리하고 있었습니다. 책을 하나 밀어 넣자, 속이 빈 금속 상자에서 툭, 하고 둔탁한 소리가 났습니다. 그 소리가 잠깐 제 가슴에도 닿았습니다. 오늘의 호흡을 조용히 놓아보는 느낌이었습니다.

책등에는 누군가가 붙여둔 오래된 대출 스티커가 겹겹이 붙어 있었습니다. 접힌 모서리, 흐릿한 연필 밑줄, 본문 사이에 낀 영수증 조각. 이 책을 지나간 손들이 얼마나 많았을지, 각자의 시간에서 어떤 마음으로 이 페이지를 넘겼을지, 상상만으로도 온기가 돌았습니다. 우리는 어쩌면, 하루라는 책을 서로에게 빌려 쓰는 사람들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누구는 급히 밑줄을 긋고, 누구는 조심스레 귀를 접어 두고, 누구는 잠깐 다른 책 사이에 끼워 둔 채 잊기도 합니다. 그러다 기한이 다가오면 반납해야 한다는 알림이 도착합니다. 마음에도 그런 알림이 찾아옵니다. 말로 갚지 못한 고마움, 끝내 풀지 못한 오해, 끝이 흐릿한 약속. 연체료가 붙은 마음의 메모들처럼요.

그런데 반납함은 따지지 않았습니다. 왜 늦었는지 묻지 않고, 책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였습니다. 구겨진 표지라도, 서둘러 밟고 지나간 밑줄이라도, 그저 받아 담았습니다. 그 조용한 수용 앞에서, 하나님을 떠올렸습니다. 우리의 밑줄과 망설임, 서툰 흔적이 그대로 남아 있어도, 그분의 품은 깊은 서랍 같아서 무언가를 감추려 하지 않아도 되는 자리. 꾸중 대신 쉼을 먼저 내어주시는 자리 말입니다.

생각해 보니, 오늘 반납함 앞에서 내려놓을 것들이 조금 있습니다. 말끝이 날카로웠던 순간과, 마음속에서 오래 굳은 서운함 한 줌, 세밀한 계획이라는 이름으로 쥐고 있던 완고함. 그것들을 하나씩 떠올리니 손잡이의 미지근함처럼 마음도 서서히 풀렸습니다. 완전한 해결이 아니어도, 그저 이름을 붙여 반납함에 넣는 상상만으로도 어깨가 가벼워졌습니다.

반납을 마치고 나오는 길, 새로운 책 한 권을 대출했습니다. 밝은 화면에 제 이름이 떠오르고, 날짜가 찍히는 짧은 소리. 오늘 필요한 만큼만 가져가는 기분이었습니다. 은혜도 어쩌면 이렇게 주어지는 것 같습니다. 내일의 몫까지 짊어지지 않게, 오늘 읽을 분량만 손에 쥘 수 있도록.

사람 사이에도 반납과 대출이 이어집니다. 빌려 쓴 친절을 다시 돌려드리고, 누군가에게서 빌려온 기다림을 또 다른 이에게 건네고, 내게 맡겨진 신뢰를 조금 더 반듯하게 다림질해 돌려드리는 일. 그 흐름이 막히지 않으면 마음도 덜 답답해집니다. 서로의 서가에 꽂힌 이야기가 오가면서 공동의 책장이 채워집니다.

문을 나서며 하늘을 올려다보았습니다. 거창한 결심 대신 작은 확인 하나만 남았습니다.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께로 돌아간다는 오래된 고백이 오늘의 숨결에도 이어지고 있다는 사실. 반납 도장이 찍히는 소리처럼 조용한 확신이 가슴에 톡, 하고 닿았습니다.

오늘의 페이지가 이렇게 넘어갑니다. 다음 장의 여백이, 이미 우리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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