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납함 앞에서

📅 2026년 03월 07일 07시 01분 발행

도서관 현관을 지나 낮은 조도를 품은 로비에 서면, 금속 반납함이 묵묵히 입을 열고 있습니다. 책 한 권을 살짝 밀어 넣자 안쪽에서 부드럽게 굴러가는 소리와 함께 둔탁한 울림이 퍼졌습니다. 별것 아닌 소리인데도, 오늘은 그 울림이 오래 머물렀습니다. 제 손에서 멀어져 어둑한 통로를 지나 누군가의 손으로 갈 책. 잠깐 제 곁에 머물렀다가 제 자리를 찾아가는 모습이, 한 사람의 하루와도 닮아 보였습니다.

표지를 쓰다듬다 보니 대출 스탬프가 연한 보랏빛으로 찍혀 있었습니다. 시작과 마감이 있는 시간표, 빌려 두었다가 돌려드리는 약속. 우리는 종종 소유와 맡김을 혼동하며 살곤 합니다. 그러나 도장이 말해 주듯, 이 책은 잠시 제 이름 아래 머물렀을 뿐, 처음부터 제 것이 아니었습니다. 생각해 보면 제게 주어진 날들도 그와 같지요. 어떤 날은 활짝 펼쳐 읽고, 어떤 날은 접어 두기도 하면서, 일정한 때가 되면 감사의 마음으로 도서관처럼 넉넉한 품에 되돌려 드리게 됩니다.

책을 넘기던 시간의 흔적이 여기저기 숨어 있습니다. 페이지 가장자리에 흐릿하게 남은 연필 점, 커피잔이 스쳐 지나간 듯한 둥근 얼룩, 늘어진 책갈피. 이전의 누군가가 숨 고르듯 멈추고 떠난 자리에서 저는 또 다른 호흡을 이어 받았습니다. 우리는 서로의 삶을 그렇게 이어 읽는 사람들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잠시 머물며 배우고, 머문 만큼의 따뜻함을 남기고, 다시 길을 내어주는 사이.

한편으로는 연체된 것들도 떠오릅니다. 미뤄 둔 안부, 끝내 건네지 못한 사과, 차일피일 밀어 둔 다정한 말 한마디. 언젠가 카운터에서 늦게 가져온 책을 내밀던 날, 직원분이 조용히 미소 지으며 괜찮다고, 오늘은 연체료가 면제되었다고 말해 주셨습니다. 뜻밖의 가벼움이 어깨에 내려앉던 순간이 아직도 선명합니다. 사람의 마음에서도 이런 사면의 시간이 열릴 때가 있나 봅니다. “범사에 기한이 있고 천하 만사가 다 때가 있나니”(전 3:1)라는 구절이 오늘은 유난히 살가웁게 다가옵니다. 늦음에도 길이 남아 있고, 놓아 보냄 속에서도 고마움이 피어나는 때가 있다는 뜻으로 들립니다.

반납함의 입구는 어둡고 속을 들여다볼 수 없지만, 이상하게도 그 안에서 책이 제 자리를 찾아갈 것을 믿게 됩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컨베이어를 타고, 분류대에 도착하고, 누군가의 손길을 기다리게 되리라는 신뢰. 언젠가 마음에서 오래 붙잡고만 있던 생각 하나를 조심스레 내려놓던 날이 떠오릅니다. 손을 떼는 일이 두려웠지만, 그 뒤로 마음 어딘가에 자리가 생겼습니다. 비워진 틈으로 빛이 다니고, 바람 대신 고요가 들어왔습니다.

도서관을 나서며 가방이 가벼워졌습니다. 허전함과 홀가분함이 묘하게 한데 섞여 있었습니다. 돌아보니, 반납은 잃어버림이 아니라 이어줌이라는 사실이 남았습니다. 제 손을 떠난 책은 다른 독자의 새벽으로 걸어갈 것이고, 오늘의 저녁은 또 다른 이야기를 맞이할 준비를 시작하겠지요. 서가 사이로 번지는 은은한 조명처럼, 우리 각자의 하루도 제자리를 찾아 차분히 빛나기를 마음속으로 바라보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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