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납함 앞의 저녁 숨결

📅 2025년 08월 21일 07시 00분 발행

문 닫힌 도서관 자동문 옆, 반납함에 작은 불빛이 켜져 있습니다. 저녁 냄새가 낀 금속 입구로 누군가 책 한 권을 밀어 넣으면, 안쪽에서 둔탁한 소리가 낮게 울립니다. 오래 손에 들려 다녔을 표지의 마모, 접힌 모서리, 영수증을 갈무리해 둔 임시 책갈피. 책은 주인의 온기를 조금 빼앗긴 채 그 불빛 속으로 사라지고, 반납함은 아무 말 없이 또 하나의 이야기를 품어 줍니다.

유리문 너머, 직원분이 작은 바퀴 수레를 밀고 다니시는 모습이 비칩니다. 수레 위에 쌓여 가는 제목들 사이로 여러 얼굴이 그려집니다. 다 읽지 못해 서둘러 넣고 가는 마음, 오랜만에 빌려 기한을 놓치지 않으려는 마음, 어린 자녀가 고이 쥐고 있다가 잠든 사이 대신 돌려주는 마음. 기한은 각자 다르고 속도도 다르지만, 반납함은 누구에게도 사유를 묻지 않고 책을 받아들입니다. 늦어도, 멈추어도, 읽던 곳에 종이를 끼워 둔 채여도 그만입니다.

낮 동안 품고 있었던 생각들이 있습니다. 끝을 보지 못한 일, 설명하기 어려운 서운함, 기쁨도 슬픔도 아닌 어떤 잔향처럼 남는 마음. 손에 오래 쥘수록 무게가 더해져, 내려놓을 타이밍을 놓치게 되는 것들이 있습니다. 반납함 앞에 서 있으면, 오늘 내 손에 남아 있는 것들 가운데 몇 가지는 빌려 썼던 마음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때가 되면 제 자리로 돌아가야 안정을 찾는, 이름 모를 정서들 말입니다.

책이 반납되어 서가로 돌아가면, 언젠가 또 다른 손이 그 책의 등을 쓸어내릴 것입니다. 그때까지 책은 고요한 질서 안에서 자기 자리를 기다립니다. 우리의 날들도 어쩌면 그러합니다. 다 읽지 못한 채 접어 둔 페이지가 있어도, 한 문단에서 길이 막힌 듯해도, 더 큰 이야기 속에서는 잠시 쉬는 자리일 뿐인지 모르겠습니다. 누구에게는 지금이 클라이맥스겠지만, 누군가에게는 쉼표가 필요한 문장일 때가 있듯이요.

오늘 떠오른 한 구절이 있습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마 11:28). 이 말씀을 떠올리면, 반납함 안쪽의 어둠이 꼭 품처럼 느껴집니다. 반듯한 설교도, 완벽한 변명도 필요 없이, 그저 맡길 자리가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어깨가 조금 가벼워집니다. 돌아가는 길이 멀어도, 빈손으로 걷는 발걸음은 대개 덜 무겁지요.

책을 반납하고 돌아서는 사람들의 뒤모습이 잔상처럼 남습니다. 피곤이 묻은 코트 소매, 잠깐 멈춘 발끝, 다시 걸음을 옮기는 등. 오늘이라는 장도 그렇게 한 줄을 지우고 다음 장을 준비하는 중일 것입니다. 서둘러 의미를 붙잡지 않아도 괜찮아 보입니다. 이해하지 못한 채 남겨 둔 문장도, 언젠가 다른 빛 아래에서 새로 읽히곤 하니까요.

도서관 유리창에 입김이 묻었다가 금세 사라집니다. 바코드가 찍힐 때 나는 낮은 소리와 함께, 안쪽의 수레가 조금 무거워지고, 바깥의 손이 조금 가벼워집니다. 오늘이 그렇게 정리된다면, 그것만으로도 충분한 수확일지 모르겠습니다. 이 밤, 각각의 삶이 자기 서가로 돌아가 조용히 기대어 있는 모습이 떠오릅니다. 그리고 그 사이를 지나는 온순한 침묵이, 내일을 건넬 힘이 되리라는 예감이 따라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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