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 치수를 재던 오후

📅 2026년 01월 31일 07시 01분 발행

동네 골목 안쪽, 오래된 신발가게에 들른 날이었습니다. 좁은 유리문을 밀고 들어가면 가죽 냄새가 먼저 반겨 주고, 나무 바닥이 조용히 울었습니다. 주인 어르신은 말수가 적은 분이었는데, 금속으로 된 발 치수 자를 꺼내 제 발을 올려 달라 손짓하셨지요. 왼발을 대고, 오른발을 대고, 발등을 살짝 눌러 모양을 살피시고는, 마치 오래 알고 지낸 이의 안부를 묻듯 “오른발이 조금 더 크시네요” 하고 고개를 끄덕이셨습니다.

종이에 적힌 숫자 몇 개가 전부였지만, 이상하게 마음이 차분해졌습니다. 사람마다 발 모양이 다르듯 살아가는 속도도, 견딜 수 있는 무게도, 숨이 트이는 간격도 각자 다르다는 당연한 사실이 그 순간만큼은 새롭게 느껴졌거든요. 크기가 맞지 않는 신발은 걸음을 둔하게 만들고, 너무 꼭 맞는 신발은 금세 물집을 만듭니다. 우리는 때로 남이 신던 칭찬의 신발을 억지로 신기도 하고, 기대의 끈을 필요 이상으로 바짝 졸라 아픈 발등을 숨기곤 합니다. 괜찮은 척 버티다 보면 마음에도 물집이 잡히지요. 아무에게도 보여 주지 못한 그 작은 물집이, 하루 끝에 가장 먼저 스스로를 향해 쏟아지는 말이 되고 맙니다.

주인 어르신은 신발끈을 매던 제 손을 보고, 매무새를 조금 바꿔 주셨습니다. 너무 조이면 발끝이 시리고, 너무 느슨하면 불안하다고, 손끝의 감각을 믿으라고요. 그 말을 들으며, 관계에도, 일에도, 믿음에도 각자의 맞춤이 있겠구나 생각해 보았습니다. 원칙을 죄어 매는 힘과 자비를 느슨히 허락하는 마음 사이에, 내게 알맞은 결이 있겠지요. 신발 속에 남겨 두는 작은 여유 공간처럼, 마음에도 숨 쉴 틈이 남아 있을 때 생각이 덜 비좁고, 사람과 사람이 스칠 때 덜 쓸립니다.

“여호와여 주께서 나를 살펴보셨으므로 나를 아시나이다”(시 139:1)라는 고백이 문득 떠올랐습니다. 내 발의 길이, 발등의 곡선, 오래된 상처가 닿던 자리까지 아시는 분. 그분이 아시는 치수로 오늘의 하루를 재어 주신다면, 남의 번호표를 들고 서 있을 필요가 없겠지요. 남보다 빨리 가야 한다는 마음이 잠잠해지고, 어제의 흙먼지를 탓하기보다 조용히 털어 낼 수 있겠습니다. 조금 느린 발걸음이면 어떻습니까. 돌아가듯 보이더라도 발바닥에 남는 통증이 덜하다면, 그 또한 선물이지요.

계산대 옆에는 수리 기다리는 신발들이 줄지어 놓여 있었습니다. 닳아 얇아진 밑창, 실밥이 풀린 끈, 굽이 비스듬히 닳은 흔적. 그 모든 흔적이 부끄럽기보다 사랑스럽게 보이더군요. 주인 어르신은 마치 오래된 친구의 등을 쓸어 주듯 신발을 다루셨습니다. 그 손길을 보며, 하나님도 우리의 걸음을 그렇게 대하시지 않을까 생각했습니다. 성급히 판단하기보다, 닳은 자리의 말을 먼저 들어 주시고, 다시 서 볼 수 있도록 조용히 꿰매 주시는 분. 모양이 똑같아지는 것이 아니라, 제 자리에서 편안히 설 수 있도록 도와 주시는 분.

문을 나서며 새 신발의 끈을 한 번 더 잡아 보았습니다. 발등을 누르는 압력이 적당했고, 발가락 앞쪽에는 손톱만 한 여유가 남아 있었습니다. 그 작은 여유가 오늘 하루의 여백이 되기를, 그래서 생각이 숨 쉬고 마음이 덜 쓸리기를 조심스레 바라보았습니다. 바닥과 밑창이 처음 인사를 나누는 소리가 조용했습니다. 어쩌면 우리의 하루도 그렇게 시작되는지 모르겠습니다. 크게 내딛지 않아도, 과장된 발걸음이 아니어도, 맞는 크기 안에서 천천히 이어지는 걸음. 그 고요 속에서, 이미 우리를 아시는 분의 시선이 따라오고 있다는 사실만으로 충분한 오후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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