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의 반납함, 돌아오는 소리

📅 2025년 12월 14일 07시 01분 발행

도서관이 문을 닫은 밤, 외벽에 붙은 무인 반납함 앞에서 한동안 서 있었습니다. 납작한 금속 뚜껑이 살짝 들리고, 손에서 책이 미끄러져 떨어질 때 나는 짧은 소리. 툭. 한 권이 어둠 속으로 들어가 다른 책들 옆에 가만히 눕습니다. 누구의 손이 닿았는지, 어떤 하루를 지나 여기 도착했는지 아무도 묻지 않는 자리. 기한을 맞춘 책도, 하루 이틀 늦어진 책도, 같은 소리로 돌아옵니다.

반납함 앞에서는 표정들이 조용합니다. 날짜를 흘려보낸 마음이 머뭇거리기도 하고, 끝까지 읽지 못한 장면이 마음 한 구석에 걸려 있기도 하지요. 얇은 대출 영수증이 접힌 자국처럼, 우리 각자의 시간에도 사소한 흔적이 남습니다. 누군가는 줄을 그은 문장을 오래 기억하려고 페이지 모서리를 살짝 접었다 펴고, 누군가는 책 사이에 버스표를 끼워 북마크로 삼습니다. 그 작은 종이 조각도 함께 반납함 속에 들어가, 밤새 아무 말 없이 숨을 고릅니다.

가만 생각해 보면, 오늘 하루도 많은 것을 빌려 쓰고 있었습니다. 누군가의 친절을 잠시 빌려 마음의 추위를 덜었고, 예상치 못한 격려로 발걸음이 한 뼘 가벼워졌지요. 때로는 내게 과분한 신뢰를 받아 들고서, 어떻게 돌려드려야 할지 몰라 조심스러워지기도 했습니다. 기쁨도 그렇고, 고요도 그렇습니다. 오래 내 것이라고 여겼지만, 사실은 잠시 맡겨진 선물 같을 때가 있습니다. 무사히 읽고 돌려보내야 하는 한 권의 책처럼요.

서가에서 빠져나온 책은 잠시 동안 누군가의 표정을 배우고, 가방의 어둠을 견디고, 식탁 위 빛 아래에서 펼쳐졌다가 다시 닫힙니다. 그 여정이 끝나면 반납함에서 하룻밤을 쉰 뒤, 아침 일찍 직원의 손을 따라 제 자리를 찾아갑니다. 우리도 어쩌면 비슷한 길 위에 서 있습니다. 각자의 자리에서 여러 색의 하루를 지나고, 때마다 마음속 이야기 하나를 다 읽지 못한 채 접어 두었다가, 때가 되면 무언가에 기대어 쉬게 되는 길.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하신 음성은, 반납함에 떨어지는 그 소리처럼 단정하고 조용합니다. 꾸짖지 않고, 묻지 않고, 돌아온 것을 맞아들이는 음성.

책등에 찍힌 여러 도장들 사이로 이름들이 겹겹이 남듯, 우리 안에도 다녀간 계절들의 기록이 겹쳐 있습니다. 어떤 계절은 밝은 연필로 표시되어 쉽게 읽히고, 어떤 계절은 잉크가 번져 글자를 알아보기 어렵습니다. 그럼에도 기록은 사라지지 않습니다. 다만, 어느 날엔가 한 줄의 문장이 결정적인 빛을 가져다 주기도 합니다. 한때는 이해할 수 없었던 말이, 다른 시간대에선 유일한 길잡이가 되지요. 그래서 반납은 끝이 아니라 다음 독자를 위한 시작이기도 합니다. 내게 머물렀던 위로가 다른 이의 손에 가서 또 한 번 숨을 쉬는 일. 내 안에서 조용히 익은 인내가, 언젠가 누군가에게 건네질 잔의 따뜻함이 되는 일.

반납함은 판단하지 않습니다. 다만 받아들입니다. 그 받아들임이 주는 안도감이 있습니다. 늦었다고 해서 책이 들리지 않는 법도 없고, 사소한 오염이 있다고 해서 방향을 바꾸지도 않습니다. 작은 긁힘, 접힌 모서리, 살짝 번진 밑줄까지도 여정의 증거로 함께 들어갑니다. 그러고 보면 우리 삶도 그와 비슷합니다. 미처 다듬지 못한 문장, 말끝에 남은 아쉬움, 마음에 박힌 주름살 같은 기억까지도, 받아들여질 때 비로소 제자리를 찾습니다.

오늘 밤, 마음속에도 조그만 반납함 하나가 열리는 듯합니다. 서둘러 단정하지 않아도 되고, 이유를 길게 설명하지 않아도 되는 공간. 미완의 계획들, 다음으로 미룬 사과의 말, 돌이켜도 풀리지 않던 질문들을 그 안에 잠시 눕혀 둡니다. “내가 맡아 두겠다”는 뜻이 공기처럼 얇게 퍼져 있는 자리에서, 깊은 호흡이 가능해집니다. 그 호흡이 지나가면, 어쩌면 그때야 비로소 몇 문장이 분명해질지도 모릅니다.

도서관 문은 이미 잠겼지만, 안쪽에선 아침 준비가 시작됩니다. 반납함 속의 책들이 하나씩 꺼내져 제 서가로 돌아가듯, 우리 내면의 이야기들도 보이지 않는 손에 이끌려 제 자리로 옮겨집니다. 무엇이 먼저고 나중인지 정리되지 않는 밤이라도, 돌아오는 소리 하나가 방향을 알려 줍니다. 툭, 하고 내려놓는 그 순간에 생기는 여백. 그 여백이 마음의 등을 펴게 합니다. 오늘은 그 소리를 따라, 오래 붙잡고 있던 한 문장을 살며시 놓아두고, 다시 시작할 힘을 조용히 모읍니다.

누군가는 내일 이른 시간, 내가 반납한 그 책을 빌려갈지도 모릅니다. 내 손때가 닿았던 곳을 지나 다른 손들이 새로운 줄을 긋고, 낯선 인생의 하루가 책장 사이에 끼어들 것입니다. 그렇게 이어지는 이야기는 누구의 것도 아니면서 모두의 것이 됩니다. 우리도 그 흐름 속에 서 있습니다. 돌아올 곳이 있다는 사실이 오늘을 견디게 하고, 맞아줄 손이 있다는 믿음이 걸음을 부드럽게 합니다. 밤의 반납함 앞에서 들었던 그 작은 소리가, 마음 깊은 곳에서도 들리는 듯합니다. 멀리서 누군가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는 소리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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