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25년 10월 30일 07시 04분 발행
아침 첫 진료 시간, 병원 대기실 의자에 앉았습니다. 소독약 냄새가 얇게 퍼져 있고, 벽에 매달린 전광판 숫자는 천천히 다음 칸을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제 손에는 하얀 봉투 하나가 가볍게 쥐어져 있었습니다. 아직 봉인을 떼지 않은 검사 결과, 열어보면 이 마음의 모양이 조금 달라질지도 모르는 종이였습니다.
맞은편에는 공룡 인형을 안은 아이가 엄마 옆에서 신발 끝을 맞대고 놀고 있었습니다. 두 칸 건너 할아버지는 접수증을 정리해 사각사각 모서리를 맞추셨고, 젊은 간호사는 작은 카트를 밀며 조용히 이름을 불렀습니다. 서로 모르는 사람들이 같은 공기를 나누며 기다리는 아침이었습니다.
천장의 스피커에서는 자동 피아노가 흐르고 있었습니다. 익숙한 멜로디가 몇 소절 돌다가 안내 방송이 시작되면 중간에서 뚝 끊기고, 조금 뒤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 연주되었습니다. 매번 처음인데, 세심히 들어보면 미묘하게 다른 속도와 눌림이 있었습니다. 어쩌면 그 작은 차이가 이 방을 지켜주는 리듬 같았습니다.
숫자는 52에서 53으로, 53에서 54로 더해졌습니다. 제 번호는 아직도 몇 칸 뒤에 있었고, 봉투 가장자리가 손끝에 자꾸 걸렸습니다. 기다림이 시간을 빼앗아 가는 줄만 알았는데, 이렇게 앉아 있으니 오히려 시간이 내 안에서 조용히 자라나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미뤄 두었던 생각들이 서로를 찾아 자리를 바꾸고, 말하지 못한 마음이 숨을 크게 들이킵니다.
성경은 “너희의 머리털까지도 다 세신 바 되었나니”라고 들려주었습니다(누가복음 12:7). 대기실 전광판이 한 칸씩 숫자를 올리듯, 하나님은 우리에게서 지나가는 것들을 허투루 흘리시지 않는다는 뜻으로 들렸습니다. 한숨, 망설임, 어제의 작은 기쁨까지도 그분의 손바닥 안에서 헤아려지는 시간이지요.
자동 피아노가 또다시 처음으로 돌아갔습니다. 같은 곡이었지만 조금 더 부드러운 음색이었습니다. 삶도 그럴 때가 있습니다. 같은 자리로 돌아온 것 같지만, 이전과는 다른 체온과 다른 마음으로 앉아 있는 우리 자신을 발견하게 됩니다. 돌아감이 퇴보만은 아니었다는 조용한 확신이 그때 생겨납니다.
아이의 공룡 인형 눈동자가 빛을 받았습니다. 엄마는 아이의 손등을 가볍게 쓰다듬고, 할아버지는 옆사람에게 자리를 조금 양보했습니다. 누군가는 컵에 물을 채워 놓고, 다른 누군가는 문을 살며시 붙잡아 주었습니다. 말보다 먼저 도착하는 친절이 방 안에 작은 온도를 만들었습니다.
기다림은 우리를 고치는 장소가 되기도 합니다. 급히 지나오느라 놓친 것들이 천천히 따라잡아 우리 어깨를 두드립니다. 미처 정리하지 못한 감정이 스스로 줄을 맞추고, 불안의 목소리는 숨을 데우며 작아집니다. 손에 쥔 봉투의 무게는 그대로인데, 마음에 얹힌 무게는 조금 옮겨진 듯했습니다.
숫자는 84를 지나 85를 가리켰고, 제 번호는 아직 오지 않았습니다. 이상하게도 초조함이 아니라 이상한 평안이 자리했습니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거의 없다는 사실이 때론 휴식이 되기도 합니다. 누군가가 나 대신 수치를 읽고, 이름을 부르고, 길을 안내해 주는 시간, 그 틈에서 마음은 자기의 속도를 회복합니다.
방송음이 울리고, 한 분이 조용히 일어나 진료실 쪽으로 걸어갔습니다. 자동 피아노는 또 처음으로 돌아갔고, 멜로디는 무너지지 않은 채 다시 시작되었습니다. 제 안에서도 작은 기도가 말 없이 일어났습니다. “당신이 아시는 만큼이면 오늘은 충분합니다.” 그렇게 고백하니 봉투의 종이결이 다정하게 느껴졌습니다.
이 대기실의 아침을 지나면 각자 다른 하루로 흩어지겠지요. 그러나 이 자리에 머물던 우리의 숨, 우리가 고쳐 달고 나갔던 용기, 서로에게 건네지 못했지만 마음속으로 빌어 주었던 평안은 쉽게 사라지지 않을 것입니다. 숫자는 계속 올라가고, 음악은 다시 시작되고, 우리의 삶도 그렇게 이어집니다.
아직 제 번호는 아닙니다. 하지만 마음은 서둘러 앞질러 가지 않습니다. 지금 이 자리에서 세어지고 있는 것들이 분명히 있다는 믿음이, 오늘을 지탱해 줍니다. 천장의 불빛이 조금 흔들리고, 누군가의 기침이 그 뒤를 잇고, 멜로디가 부드럽게 이어지는 이 틈에, 하나님께서도 조용히 자리를 함께 하신다는 확신이 피어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