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호표 한 장의 약속

📅 2025년 08월 23일 07시 01분 발행

오후 세 시쯤, 동네의 작은 우체국은 유리창을 스치는 빛과 종이 냄새로 가득합니다. 입구에서 뽑은 번호표는 얇고 가볍지만, 그 작은 종이가 한 사람의 차례와 마음의 순서를 붙들고 있는 듯합니다. 벽의 초침은 한 칸씩 천천히 옮겨 앉고, 카운터에서는 투명한 테이프가 찰칵 소리를 내며 끊깁니다. 붉은 잉크패드를 꾹 눌렀다가 도장 찍는 소리가 잦아들고, 누군가의 봉투 위 삐뚤빼뚤한 글씨가 유리 아래로 미끄러집니다. 사람들은 각자의 사정을 종이와 끈으로 묶어 이곳에 가져옵니다. 축하와 사과, 짧은 안부, 오래 미뤄둔 용기까지, 이곳에서는 모든 마음이 동일한 크기의 봉투 속으로 들어갑니다.

창구에 앉아 차례를 기다리다 보면, 도착이란 말보다 여정이란 말이 더 크게 들릴 때가 있습니다. 우편물은 주소가 분명해도 여러 손을 거치고 길을 돌아갑니다. 때로는 늦기도 하고, 뜻밖의 역방향으로 흘러가기도 합니다. 그러나 보이지 않는 길 위에서 보이지 않는 누군가가 그 작은 사각형 우표 하나를 믿고 한 걸음씩 옮겨 놓습니다. 우리의 기도도 그와 비슷하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말끝이 흔들리고 문장이 자주 지워져도, 그 흔들림과 지움이 결국 마음의 주소를 분명히 해주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성경은 이렇게 들려줍니다. “너희는 언제든지 그를 의지하고 그의 앞에 마음을 쏟으라”(시편 62:8). 분명한 우편번호가 없어도, 귀 기울여 읽어 주시는 분 앞에서는 길이 열리는 듯합니다.

간혹 반송된 봉투를 받아드는 사람들을 봅니다. ‘주소 불명’이라는 도장이 찍힌 자국 위로 작게 하품하듯 번진 잉크. 돌아온 봉투는 실패의 증거라기보다, 아직 닿지 못한 거리와 바뀐 주소를 알려 주는 조용한 안내문 같습니다. 삶에서도 그런 반송이 있습니다. 마음을 다해 건넸는데 비켜나가고, 시간은 지나도 회신이 없을 때가 있습니다. 그때 손에 남는 것은 어쩌면 얄팍한 접수증 한 장뿐일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그 얇은 종이가 알려주는 사실이 있습니다. 보냈다는 사실, 길 위에 올려놓았다는 사실, 그리고 아직 가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제 차례가 되어 봉투를 건네는 손끝이 잠시 떨립니다. 직원은 말없이 무게를 재고 우표를 붙입니다. 작고 네모난 한 장이 붙는 순간, 긴 길이 시작됩니다. 우리는 종종 크고 확실한 표징을 찾지만, 긴 길을 여는 것은 이렇게 작은 것들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번호표 한 장, 우표 한 장, 그리고 마음을 쏟아씀 한 장. 돌아오는 길, 주머니 속 접수증에서 잉크 냄새가 살짝 올라옵니다. 햇빛 속 먼지가 천천히 떠다닙니다. 오늘 보낸 소식들이 어디쯤 가고 있을지 생각해 봅니다. 어쩌면 우리 자신도 누군가에게로 가는 길 위에 있는 것 같습니다. 아직 도착하지 않았으나 분명히 가고 있다는 사실만으로, 가벼운 종이보다 더 가벼운 숨이 한 번 더 깊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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