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 오는 오후, 동네 세탁소의 푸른 체크셔츠

📅 2025년 08월 20일 07시 01분 발행

비가 길게 내려서 길이 촉촉한 오후였습니다. 동네 세탁소 유리문에는 하얀 김이 엷게 내려앉아 있었고, 안쪽에서는 다리미가 숨을 쉬듯 가느다란 소리를 냈습니다. 주인아저씨는 고무 앞치마를 두르고 스팀을 눌렀다가 떼며, 셔츠의 주름과 솔기를 천천히 쓰다듬고 계셨습니다. 유선형의 다리미끝이 지나갈 때마다 하늘빛 격자가 한 칸씩 밝아졌고, 옷걸이가 서로 부딪히는 작은 금속 소리가 비의 리듬과 맞물렸습니다.

잠깐의 기다림 동안, 플라스틱 의자에 앉아 오래된 달력을 멍하니 바라보았습니다. 날짜는 조용히 넘어가는데, 마음의 시간은 늘 제 속도로 움직이지 않는 것 같습니다. 어떤 날은 생각이 너무 먼저 달려가고, 또 어떤 날은 뒤에 남은 감정이 발목을 붙잡아 쉽사리 떼어내지지 않습니다. 오늘 같은 오후는, 마음이 금방 젖어 무게를 더해 가는 날이었습니다.

유리문을 스치고 지나간 아이가 노란 장화를 끌며 물웅덩이를 건너는 모습이 보였습니다. 밖에서 누군가 자전거 벨을 짧게 울리고 사라졌고, 그 소리가 한동안 세탁소 안쪽 천장에 매달린 전등 아래에서 빙글빙글 맴도는 듯했습니다. 삶은 늘 이렇게 외부의 소리와 내부의 숨을 섞어 놓고, 우리에게 오늘을 건네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조금 뒤, 제 이름표가 꽂힌 푸른 체크셔츠가 나왔습니다. 손으로 받아 들자 아직 따뜻함이 남아 있었고, 면섬유 사이사이에 눌어붙었던 하루의 자잘한 주름들이 풀려 있었습니다. 그 주름들은 일을 마치고 급히 의자를 떠난 저녁의 몸짓, 비에 젖은 버스 정류장의 냄새, 뜻하지 않게 들은 말 한마디의 각진 모서리를 그대로 닮아 있었지요. 다리미는 그것을 지워 버린 것이 아니라, 잠시 쉬게 해 준 것 같은 느낌이었습니다.

저는 종종 기도가 이와 닮았다는 생각을 합니다. 마음속 어지러운 빨래를 한데 모아 카운터 위에 올려두듯, 말로 다 정리되지 않는 것들을 조심스레 맡겨 보는 시간. 세탁이 돌아가는 동안 우리는 할 수 있는 일이 거의 없습니다. 덜컹거리는 소리, 물의 온기, 회전 속도를 지켜볼 뿐이지요. 그 사이에 해묵은 먼지는 조금씩 풀려 나오고, 숨은 얼룩은 빛을 다시 만나 자리를 바꿉니다. 이렇게 말하듯,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는 한 구절이 스팀 사이로 천천히 떠올랐습니다. 그 말이 다림질의 김처럼 과장 없이, 그러나 분명하게 가슴에 내려앉았습니다.

세탁소 주인아저씨는 옷을 돌려가며 단추 하나하나를 살폈습니다. 마치 작은 예식을 치르듯, 끝까지 손을 떼지 않으려는 자세였습니다. 저런 손길이 삶에는 꼭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믿음이라는 말도 어쩌면 그렇게 생겼는지도 모릅니다. 일을 벌이고 마는 성급함이 아니라, 가장 마지막 단추까지 확인하고 조용히 건네는 온기. 사람이 사람을 살리는 힘이란 대단한 구호가 아니라, 주름 하나를 펴고 실밥 하나를 정리하는 데서 묻어나는 성실함일 때가 많았습니다.

유리문을 열자 비 냄새가 한층 선명했습니다. 골목 끝 배수구에서는 물이 작은 강처럼 흘렀고, 간판 아래 고인 물웅덩이는 잿빛 하늘을 뒤집어 품고 있었습니다. 셔츠를 팔에 걸치자 열이 팔꿈치로 스며들었습니다. 생각해 보니, ‘깨끗함’은 어떤 빛깔이라기보다 이런 온도와 닮았습니다. 차갑지 않고, 과열되지 않은, 손이 쉬어 갈 수 있는 온도. 마음도 그 온도를 알면 참 좋겠습니다. 지나온 흔적을 부정하지 않으면서도, 다시 입을 수 있도록 준비되는 힘.

문득, 주름이 있어야만 알게 되는 사실들이 떠올랐습니다. 많이 웃은 날에는 입가가 먼저 구겨지고, 많이 버틴 날에는 어깨선이 먼저 무너집니다. 그 표정과 모양이 부끄러움이 아니라, 오늘을 지나왔다는 증거라는 생각을 해 봤습니다. 그리고 그 증거를 세심히 다루는 한 사람의 손길 앞에서, 마음이 조금 느슨해졌습니다. 쉬어도 괜찮다는 표식을 누군가 대신 찍어 주는 듯했습니다.

비는 계속해서 내렸고, 세탁소 안에는 철제 바구니가 하나 더 채워져 갔습니다. 삶의 바구니도 비슷하지요. 사소한 수건들, 늘입던 티셔츠들 사이에 어느 날은 꽤 무거운 이불이 들어옵니다. 돌아가는 시간도, 말려 내는 시간도 다릅니다. 그러나 결국은 마릅니다. 그리고 다시 덮을 수 있는 온기로 되돌아옵니다. 그 사실을 기억하는 일만으로도, 조금은 안도하게 됩니다.

푸른 체크셔츠를 가슴에 안고 골목을 걸어 나오면서, 오늘의 비가 내 마음의 구석구석까지 적셔 주는 것 같았습니다. 씻어 낸다기보다, 안쪽의 뭉친 곳이 제자리로 돌아갈 기회를 주는 방식으로. 바쁜 걸음 사이, 우리가 할 일은 아마 많지 않을 것입니다. 열과 물이 제 할 일을 다 하는 동안, 사람은 그저 벤치에 앉아 숨을 고르는 존재가 되곤 합니다. 그 정지의 순간 속에서, 삶은 새로이 접히고, 다시 펼쳐질 빛깔을 준비합니다.

세탁소 문 위 작은 형광등이 깜박이며 말을 건넸습니다. 오늘의 주름은 여기까지라고. 내일 또 다른 옷감 위에 앉을 햇빛을 생각하니, 마음에도 아주 얇은 미소가 놓였습니다. 비와 스팀과 따뜻한 면의 촉감으로 적혀진 오후가 천천히 저물고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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