빨래방의 둥근 창 앞에서

📅 2026년 01월 21일 07시 01분 발행

늦은 저녁, 불룩한 검은 비닐봉지 하나를 들고 동네 빨래방에 들렀습니다. 형광등이 낮게 웅웅거리고, 드럼세탁기의 둥근 창 안에서는 젖은 셔츠와 수건들이 천천히 서로를 밀어내며 돌아갑니다. 동전 투입구에 떨어지는 쇳소리와, 지퍼가 유리를 스치는 잔잔한 딸깍거림이 규칙을 만들어 냅니다. 세제 향이 공기 속에 퍼져, 낮 동안 몸에 묻은 시장의 냄새, 엘리베이터 안의 답답함, 말끝에 남았던 서운함까지 희미해지는 것만 같습니다.

세탁이 시작되면 할 수 있는 일이 줄어듭니다. 굳이 뚜껑을 열어 확인하지 않아도 물과 시간, 보이지 않는 회전의 힘이 제 일을 합니다. 우리는 종종 마음의 얼룩을 손끝으로 문지르다가 더 번지게 하고, 주름을 성급히 펴려다가 다른 곳에 자국을 남기곤 하지요. 이곳에서는 기다림이 제 몫이 됩니다. 둥근 창의 물길을 바라보다 보면, 무언가를 해내야 한다는 조급함이 의자에 잠시 내려앉습니다.

유리 안쪽에 작은 물방울들이 비늘처럼 붙어 있다가 회전에 휩쓸려 사라집니다. 금방 다시 맺히지만 금방 또 흘러내립니다. 하루도 그랬지요. 막아낸 줄 알았던 걱정이 다시 차오르고, 미뤄둔 말들이 다시 마음에 와서 앉습니다. 그렇지만 물의 일은 결국 닦아내는 쪽에 가깝습니다. 사람의 손보다 넓고, 고집보다 더 오래 버팁니다.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도 어쩌면 이와 닮아 있지 않을까요. 다만 나는, 그 일을 방해하지 않도록 조용히 앉아 있는 법을 배우고 있는 듯합니다.

건조기가 돌아가기 시작하면 공기가 살짝 더워집니다. 드럼은 한 방향으로만 돌지 않고 어느 순간 문득 멈추었다가 반대로 방향을 바꿉니다. 꼬이지 않게 하려는 배려지요. 우리의 날들도 이와 닮아서, 앞으로만 밀어붙일 수 없을 때가 있습니다. 멈춤과 되돌아봄이 없었다면 더 쉽게 상했을 마음들이, 방향을 바꾸는 사이 숨을 돌립니다. 문득 장치 옆에 붙은 린트 필터를 보게 되었습니다. 보풀과 먼지, 다른 세탁에서 흩어진 작은 실밥들이 얇은 털구름처럼 모여 있습니다. 보이지 않게 우리 삶에서도 이런 것들이 모입니다. 오늘 눈에 밟혔던 말 한 줄, 마음속에서 바스라진 기대 하나. 그 작은 것들을 털어내야 다음 건조가 잘 됩니다. 내려놓음이 꼭 거창할 필요는 없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애가의 한 구절이 스며듭니다. “그 인자와 자비가 무궁하시니 이것들이 아침마다 새로우니 주의 성실하심이 크시도소이다”(애가 3:23). 아직 밤인데도, 이 둥근 창은 아침을 준비하는 얼굴처럼 보입니다. 회전이 멈추고 문이 열리면, 따뜻함이 손바닥으로 전해지고, 구김은 생각보다 쉽게 펴집니다. 접혀야 할 선을 따라 조심스레 겹쳐 두면, 방금 전까지 물속에 있었던 천이 제 자리를 찾아갑니다. 붙잡아 주는 온기가 있을 때, 제 빛깔이 돌아옵니다. 사람도 어떤 손길 안에 놓이면 다시 부드러워진다는 것을 새삼 알게 됩니다.

빨래를 바구니에 담아 문을 나서니, 밤공기가 약간 차갑습니다. 바구니는 가벼운데 마음은 오히려 묵직해졌습니다. 버린 것이 많아서가 아니라, 맡겨지는 무게가 생겨서 그렇겠지요. 오늘 흘려보낸 물, 따뜻하게 지나간 바람, 고요 속의 작은 소리들이 다 말해 줍니다. 서두르지 않아도 되는 시간이 분명히 존재한다고. 내일 아침 옷장을 열었을 때, 보송한 수건에서 은은한 향이 날 것입니다. 그때 오늘 밤의 물과 기다림이 어떤 표정으로 내 옆에 서 있을지, 괜히 궁금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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