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26년 02월 05일 07시 01분 발행
베란다 난간에 걸린 빨랫줄에 오후 빛이 오래 앉아 있었습니다. 물기를 한껏 머금었다가 다 내어놓은 수건들이 줄지어 서 있고, 셔츠의 어깨에는 작은 집게 자국이 오목하게 남아 있었습니다. 집게를 떼면 천이 잠시 움츠러들다 천천히 평평해지고, 얇은 김처럼 따스함이 올라옵니다. 손끝이 거기에 닿을 때마다 오늘을 붙잡고 있던 무언가가 살짝 풀리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집게는 작고 고집스럽습니다. 입을 꼭 다문 채, 누군가의 손길을 기다리며 용수철 하나에 의지해 하루를 버팁니다. 작은 장치가 무게를 이기고, 바닥으로 떨어지려는 습관을 잠시 잊게 합니다. 누군가를 견디게 하는 것도 어쩌면 이런 사소한 힘인지 모르겠습니다. 눈에 띄지 않는 배려 하나, 말없이 건네지는 시간을 묶어 두는 손길 하나. 드러나지 않기에 더욱 오래 버티는 힘 말입니다.
빨랫줄이 약간 처진 모양을 보며 잠깐 멈추게 됩니다. 오늘 하루가 몸을 기댄 선이 누구에게나 하나쯤 있었겠지요. 바쁜 순간마다 정신없이 걸어 놓고 잊어버린 마음의 젖은 자리들, 그 사이에 팽팽함을 유지해 준 이름 없는 줄들. 미처 고맙다고 말하지 못했던 것들. 줄은 소리 없이 땡김과 느슨함 사이에서 균형을 맞추고, 해는 아무 말 없이 젖은 것들을 마르게 합니다.
한 장의 수건을 내릴 때, 그 섬유 사이로 이야기가 묻어납니다. 누군가의 이마를 닦던 물기, 급히 씻고 나와 어깨에 둘러매던 습관, 어쩌다 흘린 비누 거품의 향. 마른 수건을 반으로 접고 다시 한 번 접을 때, 손에 작은 태양 하나가 건네지는 듯했습니다. 하루 동안 빛이 모포처럼 겹겹이 포개져 손바닥에 머뭅니다. 그 온기를 품고 안으로 들어가면 밤이 덜 차갑게 느껴질 것 같습니다.
집게 자국은 금세 사라지지 않습니다. 천의 결이 누군가의 붙잡힘을 기억하는 동안, 자국은 오래 남습니다. 마음에도 비슷한 자리가 있겠지요. 말 한마디, 눈빛 하나, 오래 묵은 근심의 손가락이 눌러 놓은 흔적. 때로는 그 자국 때문에 마음이 둔탁해 보이기도 하지만, 곧 알게 됩니다. 떨어지지 않도록 붙들어 주던 힘도 있었다는 것을. 혹은 그 자국이 있었기에 흩어지지 않았다는 것을.
저녁이 기울면 빨래집게들이 바닥에 짧은 그림자를 드리웁니다. 송곳니처럼 보이던 그림자가 어느새 둥그스름해지는 순간, 단단함과 부드러움이 서로 자리를 바꾸어 줍니다. 사람 사이의 마음도 그렇게 모양을 바꾸며 서로를 지탱해 주는지 모릅니다. 험한 말을 단단함이라 오해하던 때가 있었고, 침묵을 무심이라 해석하던 때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더 깊은 자리에 머물러 보면, 붙들림과 놓아줌이 함께 있는 사랑을 자주 만나게 됩니다. “이 모든 것 위에 사랑을 더하라 이는 온전하게 매는 띠니라”(골로새서 3:14). 매되 묶어두는 결박이 아니라, 흩어지지 않도록 하나가 되게 하는 띠. 빨랫줄처럼 보이지 않지만, 없어서는 안 되는 것.
오늘 베란다에서 빨래를 거두며 그런 생각이 지나갔습니다. 사랑은 때때로 집게가 되고, 때로는 줄이 되어 우리를 붙들어 줍니다. 지나친 힘은 자국을 남기고, 너무 이른 놓아줌은 바닥으로 떨어지게도 하지만, 빛과 시간이 함께하면 자국은 풀리고 섬유는 제 결을 되찾습니다. 하루의 무게를 감당한 천이 내일의 어깨를 준비하듯, 마음도 다시 누군가의 체온을 받아들일 자리를 마련합니다.
마른 수건을 마지막으로 접어 올려놓자, 빈 빨랫줄이 공중에 한 가닥 길처럼 남았습니다. 아무것도 걸려 있지 않은 줄을 보며 묘한 위안이 찾아왔습니다. 오늘 우리를 붙들던 것이 지금은 보이지 않아도, 그 자리와 모양이 어딘가에 남아 있다는 사실. 어쩌면 그것만으로도 밤을 건너갈 작은 온기가 되는지 모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