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받지 못했다는 오해

📅 2025년 08월 09일 11시 01분 발행

어떤 날은 마음이 조용히 접히는 듯합니다. 누군가에게서 밀려난 것도 아닌데, 자리 하나가 비어 있는 방처럼 쓸쓸함이 들어앉습니다. 기분 좋은 인사 몇 마디로도 채워지지 않는 빈틈이 있고, 그 빈틈이 곧장 생각을 이끌어 사랑받지 못하고 있다는 결론에 닿을 때가 있지요.

돌아보면 사랑은 종종 말이 없습니다. 큰 제스처 대신 미세한 온도로 다가오고, 대단한 선물보다 하루의 리듬 속에 섞여 있습니다. 누군가는 말없이 불을 켜 두고, 누군가는 냉장고에 물을 채워 둡니다. 퇴근하여 현관문을 열 때 스며드는 익숙한 냄새, 식탁의 수저가 제 자리를 찾고 있는 모습, 그것들이 누구의 마음을 거쳐 왔는지 생각해 보면, 사랑은 이미 우리 주변에서 작은 목소리로 머물고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침묵은 때로 오해를 낳습니다. 답장이 늦은 메시지, 약속이 미뤄진 일정, 뜻밖의 침묵이 겹치면 마음은 서둘러 판단합니다. 환영받지 못했다는 생각은 빠르게 결론을 냅니다. 하지만 그 사이에 있었을 누군가의 사정과 숨 고르기도 있고, 말로 다 못하는 수줍음도 있으며, 고단한 하루가 건네는 무력감도 있습니다. 사랑은 종종 멈칫거리며 늦게 도착하고, 때로는 이름표를 붙이지 않은 채 곁에 서 있지요.

하나님에 대한 마음도 비슷할 때가 있습니다. 응답이 지연되는 시간, 잡히지 않는 위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것 같은 날들. 하지만 불쑥 떠오르는 한 구절이 있습니다. 너는 내 것이라(이사야 43:1). 누가 보증해 주지 않아도, 그분의 마음속에 새겨진 듯 선명한 말. 그 말은 증명서를 내밀지 않고도, 하루를 지탱하는 빛이 되어 줍니다.

손에 잡히는 증거가 없을 때, 마음은 더 눈에 띄는 표지를 원합니다. 하지만 사랑은 자주 숨는 방식으로 자신을 지킵니다. 구호 같은 소리보다 잔잔한 배려로, 확약서보다 늘 같은 자리에 머무는 성실함으로 자신을 드러냅니다. 새벽에 먼저 깨어 식탁 위의 식빵을 썰어 놓는 손, 아무 말 없이 쓰레기봉투를 묶어 내다 놓는 발걸음, 다퉜던 다음 날에도 변함없이 켜지는 서로의 알람. 설명하지 않는 다정함이 있습니다.

가만히 귀 기울이면, 오늘도 마음 가까이에 누군가의 작은 선택들이 포개져 있습니다. 이름이 기록되지 않은 도움들, 티 나지 않게 맞춰 둔 온도, 내가 미처 쓰다듬지 못한 마음을 대신 어루만져 온 시간들이 있습니다. 무심히 지나친 풍경을 다시 떠올려 보면, 묵묵한 마음들이 서로를 붙들고 여기까지 오게 했다는 사실이 보이기도 하지요.

사랑받지 못했다는 생각은 단호하지만, 사실은 유약합니다. 한 줌의 따뜻한 기척만 만나도 금세 모양이 흐려지고, 한 사람의 눈빛만으로도 그 결론은 흔들립니다. 그래서 때때로 우리에겐 반박이 아니라 작은 증거 하나가 필요합니다. 그 증거는 거창하지 않아도 괜찮습니다. 익숙한 컵의 테두리에 닿은 입김, 사소한 실수를 덮어 준 침묵, 다쳐서 굳은살이 된 마음이 여전히 일어나 걸어오는 사실. 그것이면 충분한 때가 많습니다.

사람 사이의 사랑이 늘 성숙하지도, 정확하지도 않다는 것을 알게 되면서, 우리는 조금 덜 단정해집니다. 상대의 침묵 속에 있는 미완의 그림과 서툰 표현을 떠올리게 되고, 나 또한 그런 존재였다는 걸 인정하게 됩니다. 이해받지 못한 기억들 사이에 이해하려는 마음이 끼어들면서, 오해는 설 자리를 조금씩 잃습니다.

어쩌면 사랑은 받은 만큼이 아니라, 알아차린 만큼 자라나는지 모르겠습니다. 누가 나를 사랑하는지 적어 놓은 명단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오늘 내 곁에서 조용히 흐르는 마음의 물길을 알아볼 수 있는 눈이 자라나는 일이 중요합니다. 그 눈이 뜨이면, 같은 하루가 다르게 빛납니다. 다정함이 말을 아낀 이유가 보이고, 침묵이 전하는 이야기가 들립니다.

혹시 오늘도 마음 한구석에서 그 오해가 다시 고개를 든다면, 그 생각을 당장 밀어내지 않아도 괜찮습니다. 그냥 곁에 앉혀 놓고, 이 방의 온도와 바람과 빛을 함께 느끼게 해도 괜찮습니다. 시간이 흐르면 오해도 이 방의 온도를 닮아 갑니다. 차가운 단정 대신, 미지근한 여지가 생깁니다. 그리고 그 여지 안에서 관계는 숨을 고르고, 우리 마음은 조금 더 여유를 배웁니다.

살다 보면, 삶의 가장 큰 위로는 설명이 아니라 존재 그 자체에서 오는 것 같습니다. 누군가가 내 곁에 있다는 사실, 내가 누군가의 곁이라는 사실, 그리고 보이지 않는 사랑이 여전히 우리를 둘러싸고 있다는 사실. 그 사실이 오늘의 순간순간을 통과해 나갈 힘이 되어 줍니다. 말이 많지 않은 사랑에게 마음의 자리를 내어 드리면, 그 사랑은 어느새 우리를 닮은 얼굴로 미소를 지을 것입니다.

사랑받지 못했다는 오해와 함께 걷던 발걸음이, 저물녘에는 조금 가벼워지기를 바라는 마음이 듭니다. 누군가의 미소가 늦게 도착하더라도, 그 미소가 오기까지의 길을 상상해 보면, 기다림의 표정이 달라집니다. 오늘도 보이지 않는 마음들이 서로를 향해 움직이고 있습니다. 그 움직임 속에 우리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 사실이면, 어둠이 서서히 스며드는 저녁에도 마음이 아주 혼자가 아니라는 것쯤은 알 수 있을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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