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리 맺힌 옥상 텃밭에서

📅 2025년 12월 18일 07시 01분 발행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고 옥상 철문을 밀자, 얇은 냉기가 볼을 스칩니다. 난간 너머로 낮은 겨울빛이 미끄러지고, 모서리에 모인 낙엽들이 바람 대신 먼 소문처럼 흔들립니다. 천천히 걸음을 옮겨 작은 텃밭에 서니, 비닐 멀칭 위로 흘린 물이 밤사이 얇게 얼었다가 가장자리부터 부서진 흔적이 보입니다. 배추 포기는 겉잎을 모아 끈으로 살짝 묶여 있고, 파 줄기에는 흙물 자국이 갈색 선처럼 남았습니다. 덮어둔 신문지는 한밤의 습기를 머금었다가 이제 햇살을 만나 잉크 향을 내며 다시 마르고 있습니다.

손등으로 흙을 건드려 봅니다. 놀랍게도, 표면의 냉기 아래로 미지근한 온기가 숨어 있습니다. 살짝 눌렀다 떼면 흙이 작은 숨을 쉰 듯 부풀어 오릅니다. 여기서 한 계절을 건너려는 생명들의 고요가 느껴집니다. 눈에 띄는 성장은 멈춘 것처럼 보여도, 보이지 않는 자리에서 무언가 계속 이어지고 있음을 흙은 오래된 어조로 들려줍니다.

한참을 그렇게 서 있는데, 옆 텃밭에 오신 할머니 한 분이 무릎에 보호대를 차고 나타나셔서 배추를 하나씩 만져 보십니다. 겉잎을 모아 묶으면서, “밤이 길어져서 너희도 추울 테지” 하고 혼잣말처럼 웃으십니다. 그 말은 기도가 가진 모양을 닮았습니다. 길거나 화려하지 않은, 다만 지금 여기의 차가움에 대해 알고 있다는 표시. 누군가를 향해 조용히 닿아가는 손의 온도. 그 모습을 바라보다가, 마음 한 귀퉁이가 서서히 풀립니다.

문득 이사야의 한 구절이 생각납니다.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며 꺼져가는 등불을 끄지 아니하며”(사 42:3). 겨울의 옥상에서, 그 말씀이 흙 속 미묘한 온기처럼 전해집니다. 꺼져가는 빛을 마음에 두고 바라봐 주시는 눈길, 부러진 자리에서조차 여전히 이어지는 생명의 결을 믿어 주시는 심장. 신문지 한 장, 끈 한 줄, 손등의 체온 같은 보잘것없는 것들이 누군가에게는 밤을 건너게 하는 다리가 되곤 합니다.

사람마다 내면에 작은 텃밭 하나쯤은 품고 사는 듯합니다. 서랍 깊숙이 들어간 편지, 자주 비어 있는 의자, 오래된 이름 하나, 마감과 청구서가 겹쳐 놓은 피로, 매일의 무늬 속에서 조심스럽게 접어 둔 기대. 바람이 불지 않아도 스스로 흔들리는 것들. 그 곁에 신문지를 덮어 두고, 너무 세게 조이지 않도록 끈을 매고, 낮 동안 모은 볕을 살짝 얹어 주는 일. 기도는 때로 그런 일에 가까운 듯합니다. 길게 말하지 않아도, 흙을 잠깐 만져 보고 내려오는 일. “여기 있습니다” 하고, 내 마음과 누군가의 마음을 함께 안으로 들어보는 일.

옥상 난간에 매달린 빨랫집게가 서로 부딪히며 작은 소리를 냅니다. 물뿌리개 바닥에 남은 물은 아직 차갑지만, 방금 스친 손바닥만큼은 오래도록 따뜻합니다. 아래층에서 문 열리는 소리, 유리창에 부딪힌 빛이 잠깐 반사되어 발끝을 밝히는 순간, 그 미세한 변화가 묘하게 용기가 됩니다. 더 나아갈 필요도, 더 잘해야 할 이유도 잠시 내려놓고, 있는 그대로의 온기가 이미 충분하다는 생각이 절로 듭니다.

오늘도 흙은 깊은 곳에서 조용히 움직이고 있을 것입니다. 서리는 사라졌다가 밤이 오면 다시 내릴 것이고, 덮은 신문지는 또 젖었다 마를 것입니다. 그 반복 속에 우리가 지닌 작은 열이 무의미하지 않다는 사실이 고요하게 증명됩니다. 작은 것들이 서로 기대어 밤을 건너는 장면을 떠올리면, 하나님도 이런 고요를 사랑하실 듯합니다. 난간 너머 빛이 조금 더 기울고, 묶어 둔 끈이 바람 없이도 가늘게 떨리고, 내려가는 계단이 전에 없이 가볍습니다.

Scroll to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