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상되었으나 사용 가능

📅 2026년 02월 28일 07시 02분 발행

도서관 문이 열리기 전 복도에 작은 바퀴 소리가 지나갑니다. 금속 반납함에 책이 떨어지는 둔탁한 소리가 잔잔하게 퍼집니다. 새벽의 차가운 공기 대신 잉크와 종이 냄새가 먼저 들어앉습니다. 사서가 반납함을 열어 책을 꺼내 들 때, 표지에 남은 손자국과 살짝 접힌 페이지 귀, 흐릿한 연필 흔적이 눈에 들어옵니다. 도장이 찍힌 날짜들이 겹겹이 어우러지고, 책은 서가로 돌아가기 전 작은 솔로 먼지를 털고, 부드러운 천으로 얼룩을 닦는 손길을 받습니다. 연필 자국 몇몇은 지워지지 않고 남습니다. 누군가의 겨울밤에 그어진 밑줄, 급히 접어 둔 페이지가 다음 독자를 조용히 기다립니다.

이 장면을 보고 있으면 하루가 떠오릅니다. 밤마다 반납함으로 미끄러지는 우리의 시간, 소리만 남기고 사라지는 듯하지만 기록은 남습니다. 어제의 한숨과 웃음, 뾰족했던 말, 미완의 용기까지. 하나님께 돌아오는 순간, 우리의 하루가 그분의 책상 위에 조용히 올려지는 책처럼 느껴집니다. 사서는 꾸짖지 않습니다. 다만 닦고 정리할 뿐입니다. 하나님도 우리의 하루를 그렇게 맞아들이시지 않을까 생각해 봅니다. “보라 내가 너를 내 손바닥에 새겼고”(이사야 49:16)라는 말씀이 서가 사이로 스며듭니다. 지워지지 않는 이름, 흠집이 사라져서가 아니라 흠집째로 기억되기 때문이라는 마음이 듭니다.

사서가 지우개를 멈추고 작은 메모 하나를 남겨 둡니다. “표지 모서리 약간 손상, 사용 가능.” 이 문장을 볼 때마다 이상하게 마음이 놓입니다. 손상되었으나 사용 가능. 우리 역시 그런 표기가 붙은 존재일지 모릅니다. 상한 마음, 굳은 어깨, 버티느라 닳은 무릎이 있지만 여전히 읽힐 문장이 있고, 건네줄 문장이 남아 있습니다. 누군가에게 필요한 문장 한 줄이 우리 속에 아직 따뜻하게 숨 쉬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카운터 옆에서 바코드 리더가 짧게 울립니다. 삑, 하고 지나가는 한 음이 은근한 위로처럼 들립니다. 인식되었다는 뜻, 어디에 속하는지가 확인되었다는 신호이기 때문입니다. 하루에도 마음은 수없이 반납되고 대출됩니다. 누군가의 말 한마디가 우리를 다시 읽게 만들고, 또 다른 사건이 우리를 잠시 보관함에 눕힙니다. 그 모든 이동이 혼란이 아니라 돌봄의 한 방식일 수 있겠다는 생각이 잠시 머뭅니다.

비 오는 날 젖은 책을 말리느라 종이 사이사이에 얇은 흰 종이를 끼워 두던 사서의 손길이 떠오릅니다. 서둘러 펼치면 더 찢어지기 쉽다며, 마른 바람을 조금 기다려야 한다고 말하던 목소리도 함께 떠오릅니다. 마음도 그렇습니다. 급히 펴면 스스로를 더 다치게 할 때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기다림은 게으름이 아니라 치유의 시간일지 모릅니다. 하나님께서도 때로는 우리 사이에 얇은 평온의 종이를 한 장씩 끼워 두시는 듯합니다. 서로 엉겨 붙지 않도록, 다시 또렷이 읽히도록 배려하시는 손길 같습니다.

책등을 곧게 세워 서가에 꽂는 일은 작은 의식처럼 보입니다. 제자리 찾아주는 손길이 고요하게 흐릅니다. 하루의 끝에 의자 등받이에 걸쳐 둔 외투를 다듬듯, 마음도 어딘가 제자리를 찾아 눕는 느낌이 듭니다. 잘한 것과 못한 것이 각자의 칸에 돌아가고, 못다 한 일은 희미한 연필선으로 내일 날짜 옆에 옮겨 적힙니다. 다급하지 않게, 그러나 미루지도 않게. 삶과 신앙의 속도가 이 정도였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잔잔하게 스며듭니다. 너무 빨라서 페이지가 찢어지지 않도록, 너무 느려서 글자가 바래지지 않도록요.

도서관 유리문에 비친 얼굴이 돌아오는 길에 조금 부드러워 보입니다. 무거운 책이 가벼워졌기 때문인지, 마음의 반납이 이루어졌기 때문인지 알 수 없습니다. 반납은 상실이 아니라 순환이라는 사실이 생각납니다. 내 손을 떠난 문장은 다른 이의 손으로 건너가 새 숨을 얻습니다. 오늘의 기쁨도, 슬픔도, 그렇게 한 바퀴를 돌아 어느 날 더 깊은 뜻으로 다시 우리를 찾아올지 모릅니다.

도서관을 나서며 호주머니 속 영수증을 괜히 접어 버리지 않습니다. 그마저 오늘을 증언하는 작은 메모처럼 느껴지기 때문입니다. 누군가의 책 여백에 남은 가느다란 밑줄처럼, 우리 각자의 여백에도 은총의 흔적이 이미 얇게 그어져 있을 것 같습니다. 다른 날, 다른 빛 아래에서 그 선을 따라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게 될 만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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