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26년 03월 29일 07시 00분 발행
늦은 오후, 동네 수선집 유리문에 달린 작은 종이 가볍게 흔들렸습니다. 다림질의 열이 배어 나온 공기 속에 비누 냄새가 섞여 있고, 재봉틀은 오늘의 마지막 박자를 천천히 마무리하는 듯했습니다. 떨어진 셔츠의 단추 하나를 손에 쥐고 서 있자, 주인어른이 서랍을 열었습니다. 서랍 칸마다 크기와 빛깔이 다른 단추들이 모여 앉아 있었습니다. 반짝이는 것, 빛이 바랜 것, 나무결이 살아 있는 것, 투명한 유리 같은 것. 마치 잃어버린 이야기들이 저마다의 모양으로 기다리고 있는 자리 같았습니다.
돋보기를 코끝에 걸고 그분이 말했습니다. “단추는 급하면 삐뚤어져요. 옷감이 한숨 돌릴 틈을 주어야 반듯해지지요.” 그 말이 제 안에서 속도를 낮췄습니다. 늘어져 있던 마음의 올이 천천히 가지런해지는 기분이었습니다. 그분의 손끝은 익숙한 박자로 바늘길을 냈습니다. 실이 천을 통과할 때마다 작은 사각거림이 귓가에 남았습니다. 의외로 그 소리는 힘이 있었고, 동시에 살가웠습니다. 잊고 지내던, 아주 조용한 확신 같은 것.
단추 하나가 사라진 동안 옷은 제 몫을 다하지 못했습니다. 목둘레가 헐렁해지고, 가슴께가 어색하게 벌어졌지요. 그 빈틈을 몇 날 며칠 대충 넘기며 살았습니다. 돌아보면 삶에도 그런 구멍이 많았습니다. 미뤄 둔 사과 한 마디, 끝내 묻지 못한 안부, 입술에서 미끄러져내린 감사. 작다고 넘겼던 빠진 고리들이 어느새 하루의 모양을 흐트러뜨리곤 했습니다.
수선집의 조용한 오후를 지켜보며 생각했습니다. 거창한 변화보다 우리를 붙들어 주는 것은 이런 작은 매만짐일지 모릅니다. 관계를 살리는 것은 큰 말보다 단정한 눈맞춤 한 번, 애써 고운 말 하나, 아무 일 없는 듯 건네는 따뜻한 손등의 온기일 때가 많습니다. 그러고 보면 주님의 손길도 대체로 이쪽에 가까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서둘러 고치지 않으시고, 상처를 비껴가지 않으시며, 허물어진 가장자리를 몇 번이고 쓰다듬으신 다음, 한 땀씩 겹치게 하시는 분. 이사야의 말이 자연스레 떠올랐습니다.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시며, 꺼져가는 심지를 끄지 아니하신다.” 그 말씀은 과장된 약속이 아니라, 조용한 공방에서 들려오는 실소리 같았습니다.
한참을 바라보던 저는, 바늘귀에 실을 꿰는 그 작은 동작에 오래 마음이 머물렀습니다. 실머리를 침으로 다듬어 눈에 맞추는 순간, 제 안에서 오래 흐트러져 있던 기도의 기운이 비슷한 모양으로 모여 앉는 듯했습니다. 길지 않아도 좋고, 번듯한 문장이 아니어도 되는 기도. 그저 내일의 단추 하나를 찾아 손에 쥐게 해 달라는, 심장 근처에서 조용히 맺히는 간구. 누군가의 빈자리 곁에 잠시 머물 힘을 달라는 부탁.
수선이 거의 끝나 갈 즈음 주인어른이 웃으며 말했습니다. “옷 만들던 이가 여분 단추를 안쪽에 달아뒀네요. 잃어버려도 다시 달 수 있게.” 그 말을 듣는 순간, 제 마음에도 오래전에 달아 주신 여분의 것들이 떠올랐습니다. 여분의 미소, 여분의 인내, 여분의 용기. 급한 하루에 흘려버려 거의 잊고 살았지만, 정작 필요한 순간에 꺼내 달면 다시 제 모양을 되찾게 하는 은혜의 단추들. 어쩌면 하나님은 우리 각자의 안쪽에, 보이지 않는 그 여분을 이미 달아 두셨는지 모르겠습니다. 실을 꿰어 다시 자리만 찾아 주면 되는 일처럼요.
딸깍, 마지막 매듭이 눌러지며 단추가 제 자리를 찾았습니다. 단추 하나가 돌아왔을 뿐인데, 셔츠가 몸을 더 든든히 안았습니다. 그 촉감이 이상하게 마음까지 정리해 주었습니다. 주머니에는 수선집이 챙겨 준 여분의 단추 하나가 들어왔습니다. 오늘이 언제라도 다 풀어질 수 있는 삶이라는 사실이 오히려 선명해졌지만, 이상하게도 그 사실이 두렵지 않았습니다. 떨어질 때마다 다시 달 수 있다는 약속 같은 무게가 손끝에 남아 있었으니까요.
가게 문을 나서며 종이 다시 한번 흔들렸습니다. 골목 저편으로 기울어 가는 빛이 수선집 유리 위에 둥글게 앉았습니다. 마음의 서랍 어딘가에도 아직 빛을 간직한 작은 조각들이 남아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언젠가 필요할 때 꺼내 달 수 있도록, 오늘의 호흡 속에 실 한 올의 여유를 남겨 두었습니다. 그리고 한참을, 바늘이 천을 지나갈 때 나던 그 사각거림을 기억했습니다. 그 소리만으로도 삶이 다시 이어질 수 있으리라는 낯익고도 새로운 확신을 조용히 품으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