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팀이 가라앉는 저녁

📅 2025년 12월 09일 07시 01분 발행

해가 기울 무렵, 동네 한켠의 작은 세탁소에서 하얀 김이 한동안 허공에 머뭅니다. 눅눅한 햇살이 철제 봉을 훑고 지나가면, 옷걸이들이 가벼운 금속 소리를 내며 자리를 바꿉니다. 비누와 섬유유연제가 섞인 향이 문턱까지 번지고, 번호표가 붙은 셔츠들이 차례를 기다리듯 다정하게 매달려 있습니다. 카운터 위에는 이름이 적힌 작은 태그들이 한 줌 놓여 있고, 그 하나하나가 주인의 하루를 담고 있는 듯합니다.

점심 무렵 맡겨진 옷을 받으며 주인아저씨는 얼룩을 손가락 끝으로 살펴봅니다. 커피의 흔적, 아이를 안다가 묻은 초콜릿 자국, 비 오는 날 차에서 내리다 튄 물방울의 흔적. 그는 얼룩마다 맞는 솔질과 온기를 알고 있는 사람처럼, 조용히 물을 적시고, 스팀을 달래고, 다림질의 방향을 바꿔봅니다. 기다림이 길다고 투정하는 사람은 드뭅니다. 이곳에서는 시간이 단단해졌다가 풀리는 순간을 눈으로 보게 되기 때문입니다.

뜨거운 다리미가 천 위를 지나갈 때, 내내 말려 올라가던 주름이 숨을 놓습니다. 마치 누군가 내 이야기를 처음부터 끝까지 끊지 않고 들어줄 때, 마음 구석의 매듭이 천천히 느슨해지는 것과 비슷합니다. 스팀이 옷감 속으로 스며들며 섬유의 기억을 조금 바꾸어 놓듯, 우리의 마음도 다정한 온기를 한번 만나면 표정이 달라집니다. 큰 가르침이 아닌, 자판기에 뽑은 미지근한 물 한 컵, 문을 잡아주던 손끝, 창고 냄새가 묻은 수건 같은 사소한 온도 말입니다.

그렇다고 모든 얼룩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지요. 어떤 자국은 소리를 낮추고 조심스레 말합니다. “여긴 이쯤이 한계입니다.” 주인아저씨는 미안한 얼굴로, 그러나 단호하게 상황을 설명합니다. 어느 정도 옅어지긴 했지만, 완전히 지우다 보면 옷 본래의 무늬까지 무너질 수 있다고. 저는 그 말을 들을 때마다 고개가 끄덕여집니다. 우리가 살아온 시간에도 그런 무늬가 있습니다. 지우려 애쓰기보다, 그 흔적이 만들어 준 결을 받아들이는 쪽이 더 우리를 닮게 하는 때가 있습니다. 바늘땀이 드러나는 수선 자국이 오히려 옷을 오래 입게 하듯, 마음의 덧댐이 우리를 더 견고하게 해줍니다.

옷에 붙은 태그를 하나씩 살펴보다 보면, 이상하게도 이름이 다정하게 읽힙니다. ‘김…’, ‘이…’, ‘박…’ 낯선 이름인데도, 삶의 무게와 체온이 함께 묶여 있어 그런지, 금세 가까워지는 기분입니다. 오래전 성경 한 구절이 떠오르기도 합니다.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 그 말은 요란하게 다가오지 않고, 다림질 끝에서 고운 김처럼 조용히 스며듭니다. 불러주는 이름이 있다는 사실만으로, 우리는 마음 한쪽을 곧게 세울 수 있습니다.

세탁소 비닐 커버가 바스락거리며 내려앉을 때, 어떤 이의 표정이 조금 가벼워지는 것을 봅니다. 새로 산 듯 반듯해진 칼라, 손등을 스치고 가는 부드러운 면, 옷걸이에 걸린 채 집까지 함께 갈 가벼운 소리. 그것으로 충분한 저녁이 있습니다. 큰 변화를 약속하지 않아도, 오늘의 무게가 약간 덜어진 느낌. 그 정도의 안도만으로도 사람은 다시 내일을 생각할 수 있다는 것을, 이 작은 가게가 가르쳐 주는 듯합니다.

우리는 각자의 하루를 정리해 옷걸이에 걸어두고, 이름이 적힌 틈새에 조용히 포개놓습니다. 쉼 없이 움직이던 생각도 어느 순간 스팀처럼 가라앉고, 물기 먹은 시간은 천천히 말라갑니다. 지워지지 않는 얼룩이 있더라도, 그것이 우리를 한 사람으로 만들었다는 마음으로, 오늘을 가볍게 집게에 집어 올립니다. 비닐이 살짝 스칠 때 나는 소리, 문이 닫히며 남기는 어둑한 공기, 손에 쥔 영수증의 얇은 질감까지. 별일 아닌 것들이 모여서, 결국 우리의 하루를 귀하게 만들어 줍니다.

저녁 공기가 조금 서늘해지는 길, 세탁소의 불빛이 천천히 낮아집니다. 스팀은 이미 사라졌지만, 그 따뜻함은 오래 남습니다. 이름을 불러주던 작은 태그처럼, 오늘의 우리도 누군가의 마음속에 조용히 걸려 있기를 바라며, 각자 집으로 돌아갑니다. 그리고 문득 생각합니다. 내일도 또다시 옷은 구겨지고, 얼룩은 생기겠지요. 그러나 괜찮습니다. 다림질의 온기와 기다림의 호흡을 우리는 기억하고 있으니까요. 그 기억이, 오늘 밤을 반듯하게 눕혀 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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