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팀 사이로 들린 이름

📅 2026년 01월 29일 07시 02분 발행

동네 세탁소에 다녀왔습니다. 늦은 오후, 문을 열자 따뜻한 습기가 볼을 스치고, 철제 옷걸이들이 서로 가볍게 부딪히는 소리가 잔잔하게 이어졌습니다. 스팀 냄새에 섞인 약한 비누향이 오래된 위로처럼 퍼졌습니다.

주인 어르신은 낡은 다리미를 천천히 밀고 당기며 한 호흡씩 길게 숨을 뱉듯 일하셨습니다. 셔츠를 받아 들고 작은 종이표를 꺼내 제 이름을 타자로 찍어 꽂으셨습니다. 그 얇은 종잇조각 하나가 제 옷의 행방을 끝까지 책임지는 표지처럼 보였습니다.

옆걸이에는 사람들의 시간이 차례로 매달려 있었습니다. 등에 가벼운 잔디 얼룩이 남은 작은 카디건, 손끝이 반짝이도록 닳은 어르신의 코트, 계절이 바뀌도록 기다린 듯한 얇은 스카프. 각자의 사정은 다 들리지 않지만, 이름표가 조용히 그 사정을 붙잡고 있었습니다.

표는 무겁지 않았습니다. 그렇지만 길을 잃지 않도록 꼭 붙어 있었습니다. 이름 하나가 돌아갈 자리를 기억하게 해 주는 것, 그 사실이 이상하리만치 든든하게 느껴졌습니다.

기다리는 동안 오늘 하루를 떠올렸습니다. 말끝이 조금 날카로웠던 순간, 마음 한켠이 구겨진 채로 지나친 표정 하나, 설명할 틈 없이 흘려보낸 오해. 눈에 보이는 얼룩은 비누와 물로 다뤄지지만, 보이지 않는 자국은 어디에서부터 풀려야 할지 막막할 때가 있습니다.

세탁소 안에서는 누구도 얼룩을 심판하지 않았습니다. 원단을 살펴보고, 온도를 고르고, 시간을 주었습니다. 힘으로 문지르기보다 스며드는 수증기로 천이 제 결을 되찾을 때까지 조용히 기다렸습니다. 은혜가 있다면 이런 모양일지 모르겠습니다. 소리를 높이기보다 온기를 더해 주고, 급히 지우기보다 견딜 만큼의 시간을 허락하는 일처럼요.

문득 한 구절이 떠올랐습니다.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 스팀 사이로 흐릿하게 보이는 글귀처럼, 그 말이 오늘 제 이름표 위로 내려앉았습니다. 숫자와 표식들 사이에서 자주 잊히는 이름, 그러나 누군가에게 분명히 불리우는 존재라는 사실이 마음을 천천히 곧게 했습니다.

완전히 지워지지 않는 흔적도 있습니다. 주인 어르신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습니다. 완벽하게 사라지지는 않겠지만, 깨끗하게 단정해질 거라고요. 사라지지 않는다는 말이 이상하게 위로가 되었습니다. 흔적은 때로 상처가 아니라 이야기의 문장처럼 남아, 우리가 어디를 지나왔는지 조용히 알려 주니까요.

다림을 마친 셔츠의 깃을 어르신이 손끝으로 살짝 세워 주셨습니다. 그 작은 동작 하나에 애정이 실려 있었습니다. 마음의 깃도 이렇게 맞춰질 수 있다면, 오늘의 숨이 조금 더 편안해질 듯했습니다. 누구의 탓을 가르는 대신, 제 결이 되살아나는 방향을 묵묵히 찾아가는 시간. 세탁소의 온기 속에서 그런 가능성이 보였습니다.

계산대 위 비닐이 부드러운 소리를 내며 포장되었습니다. 얇은 비닐에 비친 셔츠의 선이 유난히 또렷해 보였습니다. 들고 나오는 길, 팔에 기대는 무게가 들어올 때보다 가벼웠습니다. 집으로 돌아갈 준비가 된 물건은 묘하게 사람의 마음까지 정돈해 주는 듯했습니다.

하루의 옷에도 오늘의 이름표가 달려 있었겠지요. 때로는 지친 글씨로, 때로는 분명한 획으로. 어떤 모습이었든, 누군가가 그 이름을 알고 계신다는 믿음이 우리를 다시 길로 올려놓는 것 같습니다. 잊히지 않는다는 확신이 있을 때, 사람은 조금 더 부드러워지고, 조금 더 기다릴 수 있게 되니까요.

문을 닫는 소리가 뒤에서 가볍게 울리고, 길 건너 불빛이 한 겹 더 깊어졌습니다. 내일도 새 얼룩이 생길지 모르지만, 이름은 잃지 않겠다는 마음이 천천히 자리 잡았습니다. 오래되어 더 단단해진 옷감처럼, 우리 안의 결도 그런 시간을 통과하며 제 모습을 찾아갈 것입니다. 그 길 위에서, 조용히 불린 이름 하나가 오늘을 끝까지 데려다주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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