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탁 위의 바늘빛

📅 2025년 10월 10일 07시 02분 발행

부엌 불을 다 끄고 식탁 위 스탠드만 켠 밤입니다. 작은 불 아래에 오래 쓰던 앞치마를 펼쳐 놓고, 바늘귀에 하얀 실을 끼워 봅니다. 골무를 엄지에 끼우니 금속의 차가움이 살짝 전해지고, 곧 손의 온기가 그마저 덮습니다. 이음선이 풀어진 자리를 천천히 만져 보니, 생각보다 상처가 깊지는 않습니다. 그렇지만 그냥 두면 금세 더 벌어질 자리가 분명합니다. 오늘 하루도 이와 비슷했습니다. 잠깐 급해져서 놓친 말 한마디, 잊고 지나친 눈인사, 속으로만 삼킨 마음의 구김. 눈에 선명히 보이지 않아도, 살짝 잡아당기면 한 올이 따라 나올 듯한 순간들이 곳곳에 있었습니다.

바늘을 찔러 넣을 때마다 천이 조용히 숨을 고르는 듯합니다. 실을 너무 세게 당기면 가장자리가 쪼글쪼글해지고, 느슨하면 금세 풀어집니다. 적당한 힘과 호흡, 그리고 천이 기억하고 있는 결을 따라 한 땀씩. 관계도 믿음도 자꾸 그렇게 배워 갑니다. 서두르면 모양이 무너지고, 미루면 틈새가 커집니다. 오늘의 어긋남을 오늘의 온기로 붙여두는 일, 그게 우리의 작은 수선입니다.

바느질을 하다 뒷면을 돌려 보았습니다. 겉에서 보기엔 매끈한 선인데, 안쪽에는 작은 매듭이 조용히 앉아 있었습니다. 눈에 띄지 않는 그 매듭이 천을 붙들어 줍니다. 문득 지난 시간을 떠올리게 됩니다. 어느 날은 이유 없이 버텨졌고, 또 어느 날은 엉킨 마음이 생각보다 쉽게 풀렸습니다. 그때마다 삶의 안쪽 어딘가에서 보이지 않는 매듭이 지어지고 있었음을 뒤늦게 압니다. 겉면만 바라볼 땐 몰랐던 은혜입니다.

며칠 전, 오래 미루었던 안부 전화를 드린 적이 있습니다. 수화기 너머로 한동안 말이 흐르지 않았습니다. 그 조용한 틈 속에서, 오래 늘어진 마음의 실이 서로에게로 건너가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뚜렷한 해결은 없었지만, 뒷면 어딘가에 작은 결속이 만들어졌다는 확신이 남았습니다. 바늘끝이 스며드는 시간만큼, 사람 사이의 온기도 스며듭니다. 눈에 보이는 성과보다 손끝의 정성이 먼저 자리를 잡습니다.

예수께서 “남은 조각을 거두고 버리는 것이 없게 하라” 하셨다는 구절이 떠오릅니다(요 6:12). 부스러기를 헤아리는 마음, 흩어진 것들을 다시 모으려는 마음. 크고 화려한 조각이 아니어도, 남겨진 작은 부분들이 모여 한 끼의 넉넉함이 되는 것처럼, 오늘의 자잘한 순간들이 모여 하루의 품이 됩니다. 서운했던 표정 하나를 마음속에서 부드럽게 접어 두고, 미처 전하지 못한 고마움을 가만히 문장으로 정리해 보는 일. 그것만으로도 내일의 옷깃이 덜 헤어질지 모르겠습니다.

식탁 위에는 가위, 실뭉치, 자그마한 단추 몇 개가 방금까지의 손길을 증거합니다. 바늘끝이 파고들 때마다 사각거리는 미세한 소리, 숨을 맞추는 나직한 호흡, 손바닥에 스며드는 천의 온도. 이 고요한 수선의 시간은 누군가의 이름을 천천히 마음에 적어 보는 시간과 닮았습니다. 오래 마음에 걸렸던 말 한 줄을 오늘은 다 쓰지 못해도 괜찮습니다. 남겨 둔 실의 여분처럼, 미완의 문장도 내일의 손을 기다릴 수 있습니다. 급히 힘을 주지 않아도, 온기가 길을 찾아갑니다.

매듭을 지었습니다. 겉으로는 거의 보이지 않는 작은 점 하나. 그러나 이 작은 점이 앞으로의 움직임을 견디게 해 줍니다. 스탠드를 끄기 전, 바느질한 자리를 손끝으로 가만히 쓸어 봅니다. 잘 보이지 않지만 분명히 느껴지는 단단함이 있습니다. 우리의 하루도 이와 비슷합니다. 대답하지 못한 질문, 늦어진 사과, 미루어 둔 용기가 언젠가 서로를 향해 한 땀 더 가까워질 수 있겠습니다. 불을 끄면 방은 어둡겠지만, 붙들려 있는 선 하나가 남아 있습니다. 그 보이지 않는 매듭이 오늘의 끝과 내일의 시작을 나란히 이어 줄 테니, 밤은 그 자체로 충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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