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힘망의 시간

📅 2026년 02월 04일 07시 00분 발행

아침 빵집 앞을 지날 때마다 유리 너머로 보이는 식힘망이 눈길을 붙잡습니다. 한밤의 열을 지나 막 구워 나온 식빵들이 금빛 껍질을 품고 누워 있고, 얇은 김이 가만히 올라갔다가 녹아 사라지지요. 제빵사의 앞치마에는 밀가루 가루가 하얗게 묻어 있고, 벽시계 바늘은 조용히 움직여 개점 전의 한숨 같은 시간을 세고 있습니다. 누구도 서두르지 않는 그 잠깐, 빵은 아직 뜨겁고, 칼은 잠깐 기다립니다. 너무 뜨거운 빵을 서둘러 가르면 속살이 찢어지고 향도 흩어진다지요. 그래서 이 집에서는 조금의 기다림을 굳이 지켜 주는 모양입니다.

그 장면을 보며 마음 한켠이 고개를 끄덕입니다. 우리 하루도 저 식힘망 위의 빵처럼 뜨거운 한때를 지나오곤 하지요. 말이 앞서 나가 마음을 놓치던 순간, 억울했던 마음이 속을 달구던 저녁, 누군가의 한마디가 오래 화상처럼 남던 밤. 그럴 때 저는 제 안이 너무 뜨거워서, 건드리면 더 무너질 것 같을 때가 있습니다. 그럴수록 성급한 판단으로 자신을 가르던 칼날이 기억나고, 그 칼자국이 오래 남아 마음이 울퉁불퉁해지기도 하더군요.

식힘망에 놓인 빵은 시간을 받아 식습니다. 열이 사그라지면서 향이 또렷해지고, 속살은 자기 자리를 찾아 부드러워지지요. 기다림이 향을 맡게 하네요. 오늘의 한숨과 작은 후회가 아직 따끈하다면, 그 또한 나쁜 일이 아니라고 여겨집니다. 뜨거움이 있다는 건 살아 있다는 표시이고, 아직 식지 않은 마음이 있다는 건 사랑이 다하지 않았다는 증거일 테니까요. 다만 너무 이른 칼질을 멈춰 주는 누군가의 온기가 우리에겐 필요합니다. 누군가는 그 온기를 ‘하나님’이라고 부르지요. 불길 같던 예언도 지나고, 큰 흔들림도 지나간 뒤에 “불 후에 세미한 소리가 있는지라”(열왕기상 19:12)라고 했던 그 이야기처럼요. 마음이 식는 동안 들리는 소리는 대개 크지 않더군요. 숨 고르는 소리, 찻잔 가장자리로 맺히는 맑은 물소리, 식빵 껍질이 아주 고요하게 수축하며 만드는 미세한 탁탁거림 같은 것들입니다.

문득 식힘망 바닥 무늬가 빵의 바닥에 옅게 남는 걸 본 적이 있습니다. 기다림도 흔적을 남기지요. 그 무늬는 흉터가 아니라 ‘견딘 시간’의 표식 같았습니다. 우리 마음에도 그런 무늬가 있습니다. 서둘러 설명할 수 없는 밤, 떨리는 손을 잠깐 무릎 위에 얹고 지나간 새벽, 남의 안부를 뒤늦게 묻고 조심스럽게 웃던 오후. 그 위로 가만히 내려온 온기와 침묵이 우리를 조금 다른 사람으로 빚어 갔다는 걸, 시간이 지나고 나서야 알아차리게 됩니다.

빵집 문이 열리면 집게 소리가 경쾌하게 울리고, 종이봉투 사이로 따뜻한 향이 흘러나옵니다. 누군가는 아침 식탁을 준비하겠지요. 삶은 그처럼 다시 바쁘게 움직이고, 우리는 저마다의 발걸음으로 흩어집니다. 그래도 마음 어딘가에 식힘망 같은 자리를 하나 가지고 계신 줄 압니다. 말하기 전에 먼저 듣고, 판단하기 전에 한 번 더 숨을 고르던 그 자리입니다. 거기서 식은 뒤의 마음은, 더 또렷한 향을 품고 누군가에게 건네질 수 있겠지요. 저는 오늘도 그 향을 떠올립니다. 지금 여기, 눈에 보이지 않는 식힘망 위에 조용히 기대어 있는 우리의 속살이, 서서히 자기의 부드러움을 되찾고 있다는 믿음과 함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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