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25년 09월 25일 07시 01분 발행
어제 저녁, 찻물이 끓어오르는 소리 곁에서 오래된 바느질 상자를 열었습니다. 손때가 밴 나무 뚜껑을 밀자, 작게 눌린 바늘 쿠션과 여러 해 모아둔 단추들, 반쯤 닳은 줄자가 조용히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나프탈렌 냄새가 아주 옅게 남아 있었고, 한쪽 칸에는 누군가 급히 넣어둔 분홍 실타래가 엉켜 있었습니다. 단추 하나가 달아난 셔츠를 무릎 위에 펼쳐 놓고 바늘에 실을 꿰는데, 숨이 한 번 멈추고 다시 이어지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바늘귀를 찾아 들어가는 실의 가느다란 길이, 그 집중의 순간이 마음을 한곳으로 모아 주었습니다.
수선이라는 일은 새로 사는 일과 다르게, 함께 지나온 시간을 버리지 않으려는 마음이 담깁니다. 해진 곳을 덮어 감추기보다는, 닳아진 자리의 이야기를 받아들이며 다시 이어붙이는 일 같습니다. 바늘 끝이 천을 드나들고, 바늘땀이 차곡차곡 겹쳐 갈수록 세월도 함께 꿰매어지는 듯했습니다. 시편에 “그는 상한 마음을 고치시며 그들의 상처를 싸매시는도다”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그 말씀처럼, 하나님께서도 우리의 하루에서 풀린 곳들을 함부로 판단하지 않으시고, 조용한 손길로 가만히 모아 주시는 듯합니다.
겉에서는 보이지 않는 곳에 촘촘히 놓인 바늘땀이 옷을 지탱하듯, 믿음도 대단한 결심보다 보이지 않는 순간의 선택들로 견고해지는 때가 있었습니다. 급히 흘려보낸 인사 한 마디를 차분히 되돌리거나, 서운함이 고였다가 스스로 가라앉는 시간을 기다려 본 기억이 떠오릅니다. 어느새 헐거워진 마음의 단추 구멍이 생각납니다. 설명하기 어려운 피로, 이름 붙이지 못한 서러움, 말끝이 자꾸만 매워져 돌아보게 되는 대화들. 그런 자리들이 천의 닳은 면처럼 만져집니다.
실을 너무 세게 당기면 금세 끊어지고, 너무 느슨하면 쉽게 풀립니다. 적당한 여유가 있어야 옷이 몸을 따라 편안히 움직입니다. 하루도 그렇습니다. 계획을 꽉 묶어 놓았던 마음이 조금만 느슨해지면, 숨이 들어오고 나가는 길이 넓어지는 것 같습니다. 때때로 하나님은 우리의 걸음을 멈추게 하시는 것이 아니라, 걸음과 걸음 사이에 숨을 놓아주시는 분으로 느껴집니다. 바늘땀과 바늘땀 사이에 빈 공간이 있어야 천이 구겨지지 않듯, 침묵과 여백이 있어야 말이 상처를 피하고, 사랑이 버거움에 지지 않는다는 생각이 듭니다.
단추를 다 달고 나서 셔츠를 뒤집어 안쪽을 살펴보니, 바느질 자국이 고르게 이어져 있었습니다. 겉에서는 큰 변화가 보이지 않는데, 손끝에 닿는 결이 다르게 느껴졌습니다. 수선의 열기가 아직 남아 있었고, 그 온기가 천천히 사라질 때까지 무릎 위에 셔츠를 얹어 두었습니다. 우리 마음의 안쪽도 어쩌면 이렇게 조금씩 이어지고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누구도 알아채지 못한 자리에 콕콕 찍힌 작은 인내와 기다림의 땀이 모여, 다시 사람을 껴안을 힘을 돌려주는 밤. 내일 아침 이 셔츠를 누군가 맘 편히 걸쳐 보듯, 우리에게도 실 한 올의 자비가 오늘의 헐거움을 조용히 묶어 줄 것만 같은 생각이 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