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25년 12월 06일 07시 01분 발행
시장 골목 끝에 오래된 수선집이 있습니다. 유리문에는 해가 바뀔 때마다 붙였을 달력이 겹겹이 남아 있고, 문턱을 넘으면 다리미에서 오르는 김 냄새와 비누 향이 뒤섞인 공기가 먼저 반깁니다. 재봉틀 바늘이 박음질을 시작할 때 내는 또각또각한 진동이 방바닥을 타고 발끝까지 전해지고, 주인 어르신은 둥근 안경 너머로 천을 매만지며 줄자를 풀었다 감았다 하십니다. 기다리는 동안 벽에 기대선 자마다 손에 쥔 옷에 대해 한 마디쯤 마음속으로 변명하는 것 같았습니다. ‘조금만 더 맞으면 괜찮은데’, ‘한 뼘만 줄이면 내가 더 가벼워질 텐데’. 그 말들이 바늘귀로 조심스레 지나가는 인상입니다.
제 바지 밑단에도 초크로 얇은 선이 그어졌습니다. 어르신은 천을 뒤집어 안쪽을 손가락으로 가늠하더니, 말없이 시접을 넉넉히 남겨 박기 시작하셨습니다. “여유를 조금 더 두죠. 나중에 길이 바뀌면 펴서 입으면 돼요.” 그 한마디가 이상하게 오래 남았습니다. 안쪽에 남겨 둔 보이지 않는 여유, 그 덕분에 옷은 다음 계절을 기다릴 수 있습니다. 삶도 그렇게 꿰매지고 있겠지요. 눈에 보이지 않는 안쪽에, 누군가의 손길이 여분을 남겨 두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우리는 대체로 바깥면만 봅니다. 고운 바느질 선, 다림질로 눌러 반듯해진 선, 드러나면 좋은 것들. 하지만 옷을 뒤집어 보면 온통 매듭과 실밥, 덧댄 천 조각, 실이 지나간 자국이 가득합니다. 볼록한 매듭 하나가 다음 한 땀을 붙들어 주고, 보풀이 선 자리조차 옷의 사정을 말해 줍니다. 사람도 그렇습니다. 서로의 안쪽은 쉽게 보이지 않습니다. 그래서 더 조심스러울 때가 필요합니다. 말의 길이를 접어 올릴 줄 아는 조심, 판단의 가위를 너무 깊이 대지 않는 절제, 관계에도 시접 같은 여유를 남겨 두는 마음. 그 여유 덕분에 서로의 계절이 바뀌었을 때 다시 맞춰 입을 수 있습니다.
재봉틀이 빠르게 달릴수록 어르신의 발은 더 부드럽게 페달을 밟았습니다. 어느 박자에서 멈춰야 실이 끊어지지 않는지, 어느 지점에서 다리미를 들어야 자국이 남지 않는지, 몸이 먼저 기억하는 듯했습니다. 오랜 시간을 통과한 손들은 급하지 않았고, 무언가를 완벽하게 만들려는 조급함 대신 ‘살아도 되는 선’을 찾는 데 익숙해 보였습니다. 신앙의 시간도 닮았습니다. 하나님이 새 옷을 뚝 떼어 주시는 날도 있지만, 더 많은 날은 익숙한 천을 사랑으로 다시 맞춰 주시는 날인지도 모르겠습니다. 해진 무릎에 덧댄 조각처럼 말씀 한 줄이 붙고, 느슨해진 마음에는 기도의 매듭이 하나 더 맺힙니다. 주님은 우리의 머리털까지 세신다고 하셨지요. 치수를 재는 손길이 어디까지 닿는지, 오늘처럼 천을 가만히 펴 놓고 생각하게 됩니다.
수선은 버리는 기술이 아니라 남기는 기술이라는 말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덜어냄을 통해 새로움을 만들지만, 결정적인 순간에는 살려 두는 쪽을 택합니다. 그래서 안쪽에는 여분의 천이 접혀 있고, 바깥에는 살짝 단정한 선만 나타납니다. 우리도 하루를 살면서 그렇게 되곤 합니다. 다 말하지 않고 남겨 두는 문장, 다 채우지 않고 비워 두는 자투리 시간, 다 가까이 가지 않고 한 뼘 물러선 거리. 그런 여유가 결국 우리를 붙들어 주는 시접이 됩니다. 어떤 날들은 그 여유가 눈물의 마른 자리를 감추어 주고, 어떤 날들은 웃음이 번지는 길을 따라 확장되기도 합니다.
잠시 후, 다림질의 무게가 밑단을 누르며 김이 훅 하고 뿜어져 나왔습니다. 뜨거운 습기가 식어 갈 때, 마음도 함께 정리되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안쪽에 남겨 둔 여유 덕분에 옷은 앞으로도 몇 번의 길을 더 걸을 수 있을 것입니다. 오늘 우리의 말과 침묵, 걸음과 멈춤에도 그런 여유가 조용히 숨어 있으면 좋겠습니다. 드러나지 않지만 분명히 우리를 지탱하는 시접처럼, 누군가의 손길과 기도가 보이지 않는 안쪽에서 우리를 함께 꿰매고 있다는 사실을, 문밖으로 나서는 발목 어딘가에서 가만히 느끼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