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분의 단추와 시접

📅 2025년 12월 05일 07시 01분 발행

식탁 한쪽에 작은 깡통을 하나 두고 삽니다. 오래전 과자를 담았던 양철 통인데, 지금은 크고 작은 단추들이 모여 있습니다. 색이 바랜 금속 뚜껑을 열면, 부드럽게 서로 부딪히는 소리가 납니다. 그 소리를 듣고 있노라면 몇 벌의 계절과 몇 사람의 시간이 함께 흔들리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누군가는 서둘러 나가다 단추 하나를 잃었고, 다른 이는 오래 묵힌 외투를 꺼내며 빈 자리의 서늘함을 처음 알아차렸겠지요.

옷을 사면 조그만 봉투에 여분의 단추가 따라옵니다. 바늘집에 꽂아 두었다가, 필요한 날 꺼내 달아주라고 말 없는 배려가 들어 있습니다. 옷을 지을 때는 ‘시접’이라는 여유분을 남겨 둔다고 들었습니다. 살림이 달라졌을 때, 계절이 바뀌었을 때, 몸의 이야기가 변했을 때를 위해, 미리 조금의 가능성을 숨겨 두는 일이지요. 삶은 그런 여유를 잘 주지 않을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가만히 들여다보면, 우리 곁에도 보이지 않는 여분이 마련되어 있었습니다. 말이 모자라면 눈빛이, 손이 모자라면 침묵이, 용기가 모자라면 누군가의 기다림이 대신되는 순간들이 있었지요.

관계에도 단추가 떨어져 나갈 때가 있습니다. 마지막 말이 헐거워지고, 약속의 구멍이 늘어나 서로를 붙들던 매무새가 풀릴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 떠오르는 건 거창한 해명이나 정답이 아니라, 작고 튼튼한 하나의 ‘여분’입니다. 늦은 밤 안부를 남긴 짧은 메시지 한 줄, 아무 설명 없이 건네는 따뜻한 차 한 잔, 상대편 말을 끝까지 들으려는 몇 초의 정적. 꼭 같은 색깔, 꼭 같은 크기가 아니어도, 그 작은 것들이 외투를 다시 여미듯 마음을 붙들어 줍니다. 때로는 맞지 않는 단추가 달려도, 코트가 추위를 막아 주듯이요. 완벽함보다 붙들림이 먼저 효력이 있을 때가 있습니다.

기도도 비슷할 때가 있습니다. 말을 다 써버린 밤, 무엇을 더 말해야 할지 알 수 없을 때가 찾아옵니다. 그때 생각납니다. “우리는 마땅히 빌 바를 알지 못하나…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로마서 8:26). 내 입술의 말이 모자란 자리에서, 보이지 않는 ‘여분’의 숨이 우리를 위해 일하고 있었다는 사실이 조용히 가슴에 놓입니다. 믿음은 어쩌면 그 여분을 기억하는 마음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다 닳은 솔기와 느슨해진 구멍도, 아직 고칠 수 있다는 확신을 잃지 않는 태도 말입니다.

바늘에 실을 꿰어 구멍을 지나가게 하면, 원단은 한 번 더 서로를 향해 다가옵니다. 바늘자국은 남지만, 그 자국 위로 따뜻함이 덧입혀집니다. 다시는 떨어지지 않는다는 보장은 없으나, 오늘을 지날 만큼의 견고함은 손끝에서 태어납니다. 깡통을 닫으며 속으로 각자의 이름을 불러 봅니다. 어쩌면 우리 마음에도 시접이 조금 더 남아 있고, 서로를 위해 떼어 줄 수 있는 단추 하나쯤은 숨겨져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부엌 등은 은은하게 테이블을 비추고, 멀리서 엘리베이터가 멈추는 소리가 들려옵니다. 내일 누군가의 외투가 다시 여미어질지도 모르겠습니다. 필요할 때 꺼내 달 수 있도록, 우리는 오늘도 여분을 한 군데 모아 둡니다. 하늘의 서랍에도 그런 깡통이 하나 있을 것 같습니다. 우리의 빠진 자리를 기억해 두었다가, 가장 조용한 때에 맞춰 다시 붙들어 주는 그 손길. 그래서 아직, 단추 하나쯤 잃어도 길이 끝나지 않나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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