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26년 02월 18일 07시 01분 발행
골목 끝 문구점은 늦은 오후가 되면 소리가 가벼워집니다. 종이 냄새와 나무 냄새가 섞인 공기 속에서, 주인은 아무 말 없이 손잡이가 달린 연필깎이를 제 쪽으로 밀어주었습니다. 크지 않은 손잡이를 천천히 돌리면 안쪽의 칼날이 조용히 일하고, 얇은 나무껍질이 나선으로 길게 풀려 나옵니다. 흑연 가루가 손가락 끝에 묻고, 둔했던 연필 끝이 새 얼굴을 드러냅니다.
영수증 뒷면에 조심스레 선을 그어 보았습니다. 종이 위에 남는 첫 소리는 늘 미세한 떨림이 있습니다. 그 가늘고 맑은 마찰음이, 이 도구가 여전히 살아 있다는 증거처럼 들립니다. 밖의 햇살이 반쯤 기울어 카운터 모서리에 걸리고, 잘린 나무껍질은 그 빛을 받아 투명해집니다.
하루를 돌아보면 우리도 이렇게 조금씩 깎여 나갔음을 알게 됩니다. 삼킨 말 한 줄, 다른 이를 위해 비워둔 숟가락 하나, 길게 돌아간 발걸음. 내 몫이 줄어든 듯 서운했던 순간들도, 나를 덜어 냈기에 더 분명해지는 쓰임이 있었음을 뒤늦게 깨닫게 됩니다. 잃는 것만 같았던 조각들이, 내일의 글자를 더 정확히 적게 만드는 셈이었습니다.
때로는 성급함이 앞서 심이 뚝 부러지기도 합니다. 정적이 방 안에 내려앉고, 어색함이 손끝을 타고 올라옵니다. 그런 날들은 세상이 나만 빼고 매끈하게 굴러가는 것처럼 느껴지지요. 하지만 손잡이는 다시 멈출 줄 알고, 다시 돌아갈 줄도 압니다. 부러진 자리에서 다시 세워진 심은, 이전보다 천천히, 더 조심스레 종이와 만납니다.
연필 끝이 지나치게 뾰족하면 종이를 찢고, 너무 무뎌지면 팔을 괜히 피곤하게 만듭니다. 그 사이 어딘가에 오래 가는 선이 있습니다. 관계도 그러합니다. 날카로움으로 상대를 꿰뚫으려는 마음과, 모든 것을 대충 덮어 흐리게 만드는 마음 사이. 그 중간의 부드러움, 한 번 더 생각하고 한 박자 늦춰보는 그 여백 속에서 의미가 멀리 나갑니다.
연필은 짧아질수록 손바닥에 더 가까워집니다. 누군가는 줄어든 길이를 아쉬워하지만, 그만큼 체온이 나무로 스며듭니다. 나이 듦도 이와 비슷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더 빨리 달릴 힘이 줄어든 대신, 가까움이 늘어납니다. 이름을 작은 소리로 불러주고, 고맙다는 말을 입술 가까이에서 더 자주 내어놓게 됩니다.
책상 모서리에 모인 흑연 가루가 해 지는 빛 아래서 은근히 반짝입니다. 해 보려다가 접은 일들, 잘못 그어 지워낸 선들, 허비 같았던 시간이 사실은 모두 연습이었다는 듯이. 하나님 앞에서는 그런 가루들마저 버려지지 않는다는 생각이 듭니다. 손바닥으로 모아 조심히 털어내시는 분, 스며드는 먼지의 무게까지 아시는 분. 그 시선이 느껴지면 마음이 야단치지 않아도 제 자리를 찾아갑니다.
연필을 연필꽂이에 다시 세워두고, 문을 나설 때 종소리가 짧게 흔들렸습니다. 골목을 타고 저녁이 퍼집니다. 누군가는 지금 막 문장을 시작하겠지요. 오늘 깎여나간 만큼, 더 부드러운 말이 나를 지나가 주기를 바라게 됩니다. 그 마음 하나만으로도 주머니 속 연필이 덜 무겁게 느껴집니다.
이 밤에 메모 한 줄을 적게 된다면, 마음도 그 선처럼 조용히 곧아질 것 같습니다. 오늘이 우리에게 요구하는 것은 눈부신 승리가 아니라, 떨리지 않는 한 줄일지도 모르겠습니다. 그 한 줄이면 충분하다는 감각이, 조용히 가슴 안으로 내려앉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