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25년 10월 31일 07시 01분 발행
늦가을 아침, 동네 우체국 창구 앞에서 잠시 줄을 섰습니다. 유리창 너머로 햇빛이 비스듬히 들어와 먼지들이 느릿하게 떠다니고, 종이 봉투가 스치는 소리가 바닥의 고요를 부드럽게 더듬었습니다. 제 앞에 서 계신 어르신 한 분은 작은 상자 하나를 두 손으로 꼭 끌어안고 계셨지요. 상자 모서리에 손때가 묻어 있었고, 투명 테이프 아래로 삐져나온 글씨가 조금 떨려 보였습니다.
상자가 저울 위에 올려졌습니다. 전광 숫자가 가볍게 흔들리다가 어느 순간 자리를 잡았습니다. 직원분은 ‘깨지기 쉬움’ 스티커를 조심스럽게 붙이고, 도장을 툭 찍은 뒤 미소로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그 짧은 사이, 저는 저울 위에 놓인 것이 단지 종이와 테이프가 아니라 오래 묵힌 손길과 과일 향, 몇 달치의 안부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때로는 기다림의 시간까지 함께 올라가 있겠지요.
저울은 판단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저 받쳐 주고, 무게를 정직하게 알려 주었습니다. 사람의 마음도 누군가 그렇게 들어 주는 자리에 잠시 머물 수 있다면 어떨까요. 더 무겁다고 나무라지 않고, 예상보다 가볍다고 깎아내리지 않는 자리. 무게가 수치로 환산되기보다, 한 생의 사연으로 들어지는 자리 말입니다.
번호표가 한 칸씩 앞으로 움직이는 동안, 저는 언젠가 건네지 못한 말 한 줄을 떠올렸습니다. 그 말은 길어지지 않았지만, 마음속에서 오래 부피를 차지했습니다. 겉으로는 아무것도 아닌 듯 지냈지만, 제일 무거운 것들은 종종 침묵의 모서리에 숨어 있더군요. 누군가에게 전하지 못한 감사, 미처 다 풀지 못한 오해, 괜찮다는 말 사이에 고여 있던 서운함. 그런 것들이 어느 날 상자에 담긴 감처럼, 조용히 제 무릎 위로 건너와 앉을 때가 있습니다.
우체국의 저울을 내려오던 상자를 보며, 문득 오래된 달력 구석에 적힌 말씀 한 구절이 떠올랐습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마 11:28). 마음의 포장법은 서툴고 테이프가 자주 비뚤어지지만, 그분께 가는 주소만은 분명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받는 이가 확실할 때, 보낸 이는 안심하듯이요.
창구 옆에는 각양의 스티커가 놓여 있었습니다. ‘세심한 취급’, ‘이 방향 위로’, ‘물기 주의’. 우리 마음에도 이런 표지가 하나쯤 붙어 있으면 좋겠습니다. 급한 손길 앞에서 조금 더 천천히 다뤄 달라는 표시, 뒤집어지면 안 되는 사연이 있다는 사실을 알려 주는 사인. 그러면 서로의 무게를 어림짐작으로 재지 않고, 잠시라도 저울 위에 올려 놓고 기다릴 수 있을 테지요.
어르신의 상자는 직원의 손을 떠나, 보이지 않는 길 위로 나아갔습니다. 어디선가 그 상자를 기다리는 사람이 상호 이름을 한번 더 확인하고, 칼날로 테이프를 조심히 가르겠지요. 그 순간에야 비로소 상자는 자신의 뜻을 다 전할 것입니다.
오늘, 마음 한쪽에 고이 접어 둔 메시지가 있으신지요. 숫자로는 가늠할 수 없지만 분명한 무게가 있는 말, 눈을 맞추고 천천히 건네고 싶은 표정 하나. 우체국의 저울 위에서 배운 것은, 중요한 것일수록 오래 머무르는 시간이 필요하다는 사실이었습니다. 기다림과 조심스러움이 무게를 줄이지는 못하지만, 그 무게를 부드럽게 바꾼다는 것. 아마도 사랑이란 그런 방식으로, 우리 사이를 조용히 건너가는 듯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