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25년 09월 07일 07시 01분 발행
해가 기울 무렵 동네 우체국 안은 잔잔한 소리들로 가득했습니다. 투명 테이프가 박스 모서리를 스치는 끈적한 울림, 비닐 완충재의 잔잔한 바스락, 저울 위 붉은 숫자가 오르내리는 숨결 같은 떨림. 각자의 상자마다 다른 냄새가 배어 있었습니다. 마른 과일의 달큰한 향, 책에서 나는 잉크와 종이의 냄새, 먼 길 떠나기 전 주방세제의 깨끗한 기운. 누군가는 국제우편 서류를 서툴게 채우고, 또 다른 이는 어린아이 운동화 한 켤레를 휴지로 두 번 더 감싸고 있었습니다. 스탬프가 ‘탁, 탁’ 찍히는 소리는 날짜가 삶 위에 하나씩 눌려 찍히는 것처럼 느껴졌습니다.
저도 작은 상자 하나를 밀었습니다. 오래 연락이 뜸했던 친구에게 보낼 소품과 짧은 손글씨 메모 한 장. 주소를 쓰면서 몇 번이고 글자를 바로잡다가, 우편번호 칸의 칸막이에 숫자가 딱 맞아떨어지자 괜스레 마음이 정돈되는 기분이 들었습니다. 직원이 웃으며 물었습니다. “깨지기 쉬운가요?” 그 말이 상자보다 제 마음 쪽으로 먼저 다가왔습니다. 취급주의 스티커가 붉게 붙는 순간, 저 문구가 사람 사이에도 조용히 붙어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스쳤습니다.
테이프를 한 바퀴 더 감을 때마다 떠오르는 장면들이 있었습니다. 너무 느슨한 말은 금세 풀려버렸고, 지나치게 팽팽한 침묵은 오래 버티지 못했습니다. 포장은 결국 적당한 탄력을 찾는 일에 가까웠습니다. 저울에 올려진 상자는 무게를 드러냈지만, 그 안을 채우고 있는 마음의 무게는 숫자로 나오지 않았습니다. 창구 위에 상자를 올려놓고 손을 떼는 그 찰나, 손끝에서 무언가가 살짝 비워지는 느낌이 전해졌습니다.
영수증에는 촘촘한 글자와 함께 추적번호가 찍혀 있었습니다. 물건의 이동은 화면으로 따라갈 수 있지만, 건네진 말의 향방이나 눈빛의 온도가 어디쯤 머물다 저문 저녁에 닿는지는 기록되지 않습니다. 그래서인지 기도는 종종 추적번호 없는 소포를 떠올리게 했습니다. 보내고 난 뒤의 기다림, 도착 확인을 받지 못해도 손 안에서 영수증 같은 신뢰가 조용히 접혀 있는 상태. “너희 염려를 다 주께 맡기라, 이는 그가 너희를 돌보심이라”(벧전 5:7)라는 구절이 창구 유리 너머 달력처럼 눈에 걸렸습니다. 맡김이라는 말 속에 손을 떼는 동작이 함께 들어 있었습니다.
창구 옆 포장대에서는 연로한 어르신이 둥근 항아리 뚜껑을 신문지로 정성껏 감싸고 있었습니다. 멀리 있는 손주에게 보낸다는 김부각이라며 소리가 새나오지 않게 테이프를 가로세로 붙이셨지요. 반대편에서는 젊은 부부가 작은 상자에 분홍색 양말을 넣고 문구 스티커를 한 장 붙였습니다. ‘부서짐 주의’라는 빨간 글자가 마치 사람의 연약함을 부끄러움 없이 드러내는 문장처럼 보였습니다. 누군가에게는 이 문구가 방패가 아니라 초대가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조심해 달라는 부탁 속에는 함께 나누고 싶은 마음이 숨어 있으니까요.
우체국의 소리 사이에 한 가지 단어가 오래 남았습니다. ‘접수’. 받아들여졌다는 뜻. 그 말에는 얼룩을 탓하지 않고, 멀리서 온 손글씨를 읽어주고, 잘 도착하도록 도와주겠다는 약속이 들어 있는 것 같았습니다. 신앙 안에서의 ‘접수’도 이와 닮아 보였습니다. 연약하다는 표지가 붙어 있어도 거절당하지 않는 자리, 깨어지기 쉬운 부분이 분명해도 더 단단한 손에 맡겨지는 자리. 숨이 막히지 않도록 일부러 남겨둔 빈 공간처럼, 기도의 문장들 사이사이에는 침묵이 완충재가 되어 주었습니다. 너무 꽉 채우지 않는 신뢰가 그 안에 깃들어 있었습니다.
문 밖으로 나서는데 자동문 유리에 제 얼굴이 잠깐 비쳤다가 사라졌습니다. 들고 있던 것이 줄어들었다는 이유만으로 어깨가 가벼워지는 감각이 낯설지 않았습니다. 집 안 어딘가에는 아직 열지 못한 상자들이 남아 있었습니다. 미루어 둔 사과, 말하지 못한 고마움, 해답을 찾지 못한 질문들. 오늘 보낸 작은 소포 하나가 그 상자들 사이를 비추는 손전등처럼 느껴졌습니다. 언젠가 그 겉면에 주소를 쓰게 될지도 모릅니다. 받는 사람은 누군가의 이름일 수도, 오래전의 나일 수도 있겠지요.
저녁 기온이 문손잡이에 옮겨 놓은 차가움을 아직 품고 있었습니다. 붙잡던 것의 온도가 서서히 식어 가는 이 시간이 필요해 보였습니다. 삶의 무게가 줄어드는 일은 거대한 결심보다, 테이프 한 줄의 성실과 창구 위에 올려두는 용기에서 시작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오늘은 어떤 마음 하나가 길을 떠났습니다. 어디쯤 가고 있을지, 조용히 상상해 보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