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녁 시장, 남은 조각

📅 2026년 09월 11일 07시 01분 발행

저녁 무렵 동네 시장을 지나다가 발걸음이 잠시 멈춘 적이 있습니다. 하루 장사를 접는 손길들이 각자의 리듬으로 움직이고 있었지요. 포도송이를 감싸주던 종이박스는 접혀 다시 끈으로 묶이고, 얼음을 품었던 스티로폼 상자에서는 마지막 물길이 골목을 따라 미끄러졌습니다. 고무줄을 한 번 더 감아 파를 묶는 상인의 손등에는 소금기 섞인 땀이 반짝였고, 철제 셔터는 서서히 내려오며 얕은 금속성 울림을 남겼습니다. 붉은 어묵 국물의 향, 갓 볶은 깨의 고소함, 저녁 공기의 서늘함이 한데 섞여 작은 하루의 끝을 은근히 알리고 있었습니다.

그때 가장 눈에 들어온 것은 화려한 진열대가 아니라 바닥에 남은 자잘한 것들이었습니다. 깨 몇 알, 떨어진 대파의 파란 끝, 반쯤 찢어진 영수증, 붉은 고춧가루 한 줌. 저울의 추는 이미 옆으로 치워졌지만, 한나절 동안 수많은 손길을 받아 흐릿해진 스테인리스 판에는 둥근 닦임의 흔적이 빛을 받아 잔잔히 번졌습니다.

사람의 하루도 이와 닮아 보였습니다. 계획표의 굵은 줄은 예쁘게 지워졌어도, 마음 바닥에는 자잘한 조각들이 남습니다. 마무리하지 못한 말, 괜히 세게 누른 한숨, 마음에 걸리는 작은 미안함, 그리고 누군가에게 건넨 웃음의 따뜻한 잔향. 버릴 만한 것 같다가도, 손에 쥐면 무언가 말을 거는 것들입니다.

예수께서 “남은 조각을 거두고 버리는 것이 없게 하라”고 하셨지요(요 6:12). 그 말씀을 떠올리면, 하늘은 남김을 가볍게 보지 않으시는구나 싶습니다. 오늘의 부족함도, 다 하지 못한 사랑도, 이미 늦은 사과도, 주님 손 안에서는 다시 살이 되고 빵이 되는구나 하는 마음이 듭니다. 사람의 눈에는 자투리 같아도, 은총의 자루에는 가장 먼저 담기는 것일지 모르겠습니다.

귤을 까던 손끝에 오래 남는 향처럼, 선한 마음의 아주 작은 움직임은 밤을 지나서도 자리를 지킵니다. 툭툭 흩어졌던 생각들이 차분히 가라앉을 때, 그 향이 더 또렷해집니다. 누군가의 이름을 마음으로 한 번 더 불러 본 일, 버스에서 자리를 살짝 비켜 앉아 만든 여유, 괜찮다는 눈짓 하나. 크지 않아서 더 오래가는 고요한 흔적입니다.

시장에는 정확한 무게를 재던 추와 저울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사랑은 그런 방식으로 셈해지지 않는 듯합니다. 오늘 건넨 호의가 백 그램인지, 받은 위로가 오십 그램인지 헤아릴 수 없으니까요. 셈이 멈추는 자리에서 비로소 넉넉함이 시작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남은 조각을 아까워하는 마음이 아니라, 그 조각에 깃든 이야기를 듣는 마음으로.

저녁 시장 한켠에서, 상인이 파의 질긴 뿌리를 골라내며 미소를 띠었습니다. 뿌리를 모아 끓이면 국물이 시원하다고, 집에서 그렇게 쓴다며 봉지에 살짝 넣어 주더군요. 버리면 그만인 것을, 누군가는 국물의 깊이가 된다 말해 주었습니다. 오늘의 우리에게도 그런 뿌리들이 있겠지요. 쉽게 버려진 뒤에야 비로소 맛을 내는 부분.

하나님은 종일 분주한 우리 손보다 느린 손을 가지신 분 같다고 느껴집니다. 묵직한 결정을 서두르지 않으시고, 단정히 묶어 두어야 할 것을 끝내 묶어 주십니다. 파를 잡아 돌리던 고무줄이 마지막에 한 바퀴 더 감기듯, 우리의 하루도 은근히 정리되어 가는 순간이 있습니다. 그것이 은혜라면, 서두름이 아니라 남겨 둔 것에서 시작되는 은혜일 것입니다.

셔터가 모두 내려간 뒤에도 시장 어귀의 작은 가로등 하나가 늦게까지 켜져 있었습니다. 젖은 바닥이 그 불빛을 얇게 받아 적시며 골목 끝까지 이어졌지요. 빛이 물 위에서 길을 만들듯, 남은 조각들 사이로도 길이 나고 있었습니다. 오늘을 들고 돌아가는 각자의 봉지 안에, 값으로 매길 수 없는 것들이 조용히 담겨 있을 것 같습니다. 내일 아침, 그 봉지를 여는 소리만으로도 향이 먼저 번져 나올지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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