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25년 12월 11일 07시 01분 발행
해가 기울고 부엌 불빛이 조용히 켜지면, 쌀 한 되를 대야에 붓는 일이 하루의 끝을 알리는 작은 의식처럼 느껴지곤 합니다. 찬물을 붓는 순간, 투명하던 물이 하얗게 흐려집니다. 손끝으로 원을 그리듯 천천히 저을 때, 그릇 벽을 스치는 알갱이들 소리가 낮고 맑게 울립니다. 그 소리 사이로 낮에 마음에 남았던 말들, 어쩐지 가시처럼 걸리던 표정 하나가 함께 떠오르는 듯하지요.
물을 따라 버리면 부연 빛이 배수구로 흘러갑니다. 한 번, 두 번, 세 번. 묻거나 설득하지 않고, 물은 제 할 일을 합니다. 조금 전까지 온통 흐려 보이던 것이 서서히 맑아지듯, 마음도 그렇게 돌아오는 밤들이 있습니다. 곁에서 누군가 자꾸 다독이지 않아도, 두 손으로 하던 일을 천천히 계속하다 보면, 설명하지 못했던 마음이 가라앉습니다.
쌀이 물을 마시는 시간은 눈에 잘 보이지 않습니다. 겉은 여전해 보이는데 속에서는 아주 미세하게 길이 열립니다. 기다림을 어려워하는 날에도, 이 조용한 간격이 내일의 포근함을 준비하고 있더군요. 빌립보서 1장 6절은 우리 안에서 착한 일을 시작하신 분이 끝까지 이루신다고 말합니다. 덮개 아래에서 일어나는 변화를 우리가 다 보지 못해도, 그 말은 참 모양새로 마음에 놓입니다.
밥솥 버튼이 눌리고 나면, 곧 우리 손이 할 것은 없어집니다. 끓는 물과 뜨거운 김이 알아서 길을 냅니다. 잠시 후 집 안을 가득 채우는 향기는 보이지 않는 일을 했던 시간의 증거 같지요. 그 냄새를 맡는 순간, 별다른 성과를 내지 못한 하루도 누군가의 밥이 되어 주었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살며시 고개를 듭니다.
식탁에는 각자의 하루가 그릇에 담겨 앉습니다. 한쪽에서는 성급했던 말이 떠오르고, 다른 쪽에서는 조심스레 건넨 미소가 문득 살려집니다. 김이 피어오르는 밥을 사이에 두고 숟가락을 맞추다 보면, 서로의 속도가 조금씩 비슷해집니다. 서둘러 해명하지 않아도 좋고, 서둘러 이해받으려 애쓰지 않아도 괜찮아지는 시간이지요.
오늘 마음에 남아 있는 탁함이 있다면, 그 이유를 끝까지 밝혀내려 애쓰기보다 한 대야의 물처럼 그냥 그 앞에 머물러 있어도 괜찮겠습니다. 물은 묻지 않고 감싸고, 감싸며 흘려보냅니다. 말로 다 닿지 않는 기도의 자리는 때로 그런 물과 닮았습니다. 손에 닿는 온기가 얼음을 녹이듯, 말없이도 풀리는 순간이 찾아오곤 하니까요.
알갱이마다 미세한 숨구멍이 열려 부드러워지듯, 단단히 움켜쥐고 있던 마음에도 스며드는 시간이 있습니다. 그 사이로 들어온 따뜻함이, 오래 굳어 있던 생각을 새 자리에 내려놓게 합니다. 마지막 김이 공중에 가느다랗게 실을 남기고 사라질 때, 그 실을 타고 한 호흡의 평안이 우리 안으로 내려오는 듯합니다. 오늘 밤, 그 얇은 온기가 각자의 그릇을 조용히 채우기를 바라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