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25년 12월 19일 07시 01분 발행
오늘 동네 우체국에 들렀습니다. 문을 열고 들어서니 고무도장이 부드럽게 찍히는 소리와 잉크 냄새가 먼저 반겼습니다. 번호표를 뽑아 손에 쥐고 서 있자, 저 끝 창구 위로 붉은 숫자가 바뀌었습니다. 누군가 작은 상자를 밀어 올리자, 회색 저울의 바늘이 잠깐 떨리더니 제 자리를 찾아 앉았습니다. 아주 미세한 숨처럼 보였습니다. 잠시 머뭇거린 뒤, 스스로 가벼워지는 법을 기억해내는 듯한 그 바늘의 움직임을 한참 바라보았습니다.
예전에는 편지를 자주 썼습니다. 더는 붙일 곳이 없어 봉투 모서리가 조금 닳아 있는 편지를 들고 돌아서던 날도 있었습니다. 그때도 이런 저울이 있었지요. 손보다 훨씬 공평한 표정으로, 아무 말도 하지 않지만 모든 것을 알고 있는 얼굴로, 봉투를 받아 올려놓고 가벼운데도 분명한 무게를 기록해 주었습니다. 우체국의 저울은 늘 정확했고, 저는 그 정확함에 기대어 한숨을 놓곤 했습니다.
앞자리 어르신은 연둣빛 글씨가 흐릿하게 비치는 봉투를 붙이셨습니다. 창구 직원이 묻고, 어르신이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도장이 ‘툭’ 하고 내려앉는 순간, 마치 누군가의 마음 한가운데 작은 점 하나가 찍히는 것처럼 느껴졌습니다. 내용이 얼마나 깊든, 그 모든 것을 감싸 안은 종이의 무게만 저울은 기억합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붙인 뒤에 손이 가벼워지는 순간이 있습니다. 비밀을 털어놓았다는 가벼움이 아니라, 갈 곳을 정해 주었다는 안도의 가벼움 말입니다.
저울 앞에 서면 관계의 무게가 떠오릅니다. 오늘 품었던 말 한 줌, 걱정 몇 스푼, 어젯밤 짧은 후회 한 조각. 이것들을 어디에 올려야 할지 몰라 주머니마다 나눠 넣고 다니는 날이 있습니다. 그러다 이 회색 저울을 보며 생각했습니다. 마음에도 저울이 있다면, 무엇을 기준으로 평형을 잡을까. 옳고 그름만으로는 설명되지 않는 일들이 우리의 손을 붙잡고 놓아주지 않을 때가 많습니다. 다만 건너갈 다리를 정해 주는 순간, 무게가 바뀐다는 사실을 이곳에서 자주 배웁니다. 보내는 일은 떠나보내는 일이면서도, 도착을 믿는 일과 닮아 있습니다.
창구 직원은 상자 위에 작은 스티커를 붙이며 말했습니다. “안전하게 도착할 거예요.” 그 말이 영수증보다 확실한 약속처럼 들렸습니다. 신앙의 어떤 순간도 이 말을 닮았습니다. 다 측량할 수 없어도, 다 알 수 없어도, 맡겨진 것이 가는 길을 잃지 않는다는 믿음. 그래서인지 나는 때때로 이 저울을 믿음의 표정으로 기억합니다. 눈금을 잰 뒤 건네받는 종이 한 장이 전부인데도 돌아서는 발걸음이 가벼워집니다. 손바닥에는 방금 쥐고 있던 상자의 온기가 없어졌지만, 사라진 자리에 작은 빈틈이 생기고, 그 빈틈을 통과해 오늘의 숨이 조용히 드나듭니다.
기다리는 동안 마음에 한 구절이 떠올랐습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마태복음 11:28). 우편 스티커처럼 붙여 놓고 필요할 때마다 확인하는 약속이 아니라, 저울의 바늘이 흔들림 끝에 제 자리를 찾듯, 그 약속이 내 안에서 자리 잡는 경험에 가깝습니다. 내 힘으로는 분별할 수 없는 것들, 이름 붙이기 어려운 마음의 덩어리들이 그 앞에서 조금씩 결을 바꿉니다. 이곳에서 나는 내 속 사물들의 자리를 천천히 바꿔 앉히곤 합니다. 내려놓아야 할 것을 내려놓고, 품어야 할 것을 품는 일은, 늘 무겁다가도 어느 순간 가벼워집니다.
번호가 불리고, 제 차례가 되었습니다. 종이 봉투를 저울 위에 올려놓고 주소를 다시 확인했습니다. 글씨 끝이 조금 떨렸지만, 갈 곳은 분명했습니다. 도장이 또렷하게 내려앉고, 영수증이 얇은 소리로 길게 뽑혔습니다. 종이 끝이 말려 올라가다 이내 누워버렸습니다. 손에 남은 것은 작고 가벼운 한 장이었고, 보이지 않게 남은 것은 누군가에게 닿을 약속이었습니다.
가게를 나서며 생각했습니다. 삶도 하루에 몇 번씩 이런 저울 앞에 서는구나. 보태야 할 말과 덜어내야 할 마음을 분간하고, 갈 곳을 적어 붙이고, 떨리던 바늘이 숨을 고르는 시간을 지나는구나. 아직 보내지 못한 말들이 마음 어딘가에 모여 있다면, 그들의 주소를 천천히 떠올려 봅니다. 수신인의 이름을 또렷하게 적을수록, 길은 자연스레 드러나는 법이지요. 오늘도 어딘가에서 한 장의 종이가 누군가의 손으로 조용히 건너가듯, 우리의 마음도 그렇게 자리를 찾아가고 있을지 모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