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26년 02월 25일 07시 01분 발행
해가 기울 무렵 베란다에 작은 대야를 놓고 미지근한 물을 받았습니다. 부엌 서랍에서 부드러운 천을 꺼내 고무나무 잎을 하나씩 닦아 봅니다. 며칠 새 눈에 보이지 않게 얹힌 먼지가 잎마다 앉아 있었는지, 첫 잎부터 물이 잿빛으로 변합니다. 천을 가볍게 적셔 잎맥을 따라 조심스레 훑다 보면, 그동안 마음 어디에도 닿지 못한 말들이 물과 함께 풀려 나오는 듯합니다.
잎 하나에도 제 살결이 있었습니다. 어떤 잎은 반들거리지만, 어떤 잎은 끝이 살짝 헤져 있었습니다. 그 해진 자락을 만질 때, 누군가의 지난 며칠이 겹쳐졌습니다. 억지로 웃던 얼굴, 말을 아끼던 어깨, 아무 말 없이 먼저 설거지를 시작하던 손. 대야 속 물빛이 점점 탁해질수록 오늘을 설명하지 못한 마음의 부스러기들도 거기로 모였습니다. 한 번 물을 갈고 나면, 묵직하던 생각이 조금 옅어집니다. 새 물을 부을 때 나는 고요한 소리가 방 안에 번지면, 나도 다시 시작할 힘이 남아 있구나 하는 마음이 뒤따릅니다.
천이 잎맥을 따라 미끄러질 때, “너희에게는 머리털까지 다 세신 바 되었느니라”(마 10:30)는 말씀이 조용히 떠올랐습니다. 누군가의 머리카락까지, 그러니 이 잎의 작은 상처와 반짝임까지도 헤아리시는 시선. 거창한 게 아니라, 이렇게 작고 세심한 손길에 담긴 관심. 큰 소리로 다짐하지 않아도, 미세한 떨림을 아시는 분이 계시다는 생각이 손끝을 잠시 멈추게 했습니다.
먼지를 닦아낸 잎은 금세 달라 보입니다. 빛이 스며들 자리를 열어 주었을 뿐인데, 잎은 스스로 더 짙은 초록을 드러냅니다. 사람도 그렇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크게 바꾸는 일보다, 작은 닦음이 쌓여 하루의 결을 바꿀 때가 있습니다. 말끝을 조금 낮추는 일, 눈을 한 번 더 맞추는 일, 급히 지나친 안부를 저녁에라도 짧게 건네 보는 일. 그것들이 우리 사이의 빛자리를 마련해 줍니다.
물에 젖은 천을 쥐고 있자니 오래된 서운함이 생각났습니다. 꿰매어 말끔히 없앨 수는 없지만, 그 위에 젖은 천을 한 번 눌러 주듯 마음을 다독이면, 표면의 거칠음이 조금 누그러집니다. 미안함이 떠오르면, 내일은 그 말부터 건네 보고 싶다는 생각이 따라옵니다. 굳이 해명하지 않아도 괜찮고, 정답을 찾으려 애쓰지 않아도 됩니다. 오늘의 물은 오늘 쓰고, 내일의 물은 내일 새로 데우면 됩니다.
대야의 마지막 물을 버리고 나니 손에 남은 물방울이 서늘했습니다. 바닥에 떨어진 몇 개의 동그란 자국이 금세 스며들어 사라졌습니다. 흔적은 빨리 마르지만, 방금 닦은 잎의 윤기는 한동안 남아 있었습니다. 그 빛을 바라보며 마음 한쪽에 조용한 약속을 하나 얹어 봅니다. 누군가의 하루를 향해, 소리 없이 닦여 나갈 한 조각의 관심. 오늘은 그것으로 충분하다는 듯, 베란다 공기가 가볍게 바뀌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