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본실의 오후, 한 땀의 평안

📅 2026년 01월 09일 07시 01분 발행

도서관 뒤편 제본실에 들렀습니다. 낮게 깔린 조명이 종이결을 부드럽게 드러내고, 오래된 풀의 냄새가 천천히 방을 채웠습니다. 장갑 낀 손이 바늘을 들고 책등을 지나갈 때, 아주 작은 소리가 들렸습니다. 사각, 하고 파고드는 그 소리는 마치 종이가 오래 참았던 말을 조심스레 꺼내는 숨 같았습니다.

해어진 책 한 권이 테이블 위에 놓여 있었습니다. 표지는 반듯하게 닳아 있었고, 속지는 가장자리마다 삶의 손길이 스며 있었습니다. 누군가의 메모가 연필빛으로 남아 있고, 잔잔한 얼룩이 한 계절을 붙들고 있었습니다. 제책사는 찢긴 곳을 덮어 지우지 않았습니다. 얇은 한지를 덧대며 실을 통과시키는데, 그 매듭이 어디에 숨어 있는지 거의 보이지 않았습니다. 상처를 감추기보다, 거기서부터 다시 이어 줍니다. 책은 그렇게 자신의 시간을 잃지 않고, 앞으로 읽힐 시간을 얻는 듯했습니다.

한 권의 책이 다시 책이 되는 동안, 기다림이 많이 필요했습니다. 풀은 제 속도로 마르고, 눌림틀의 무게는 불필요한 부풀림을 가라앉혔습니다. 덜 마른 채로 서둘러 넘기면 또 찢어지기 쉽다는 걸, 제본실의 오후는 조용히 알려주었습니다. 오늘 하루도 비슷했습니다. 마음 한쪽에 흩어진 문장들이 있었습니다. 끝내지 못한 말, 괜히 높아진 목소리, 돌아와 보니 빈자리처럼 느껴지는 웃음 하나. 금세 봉합하고 싶은 마음이 앞설수록 실은 자꾸 얽혔습니다. 잠시 눌러 두고, 제 속도로 마르게 두어야 비로소 모양이 잡혔습니다.

제책사는 종이의 결을 손끝으로 더듬으며 실의 긴장을 살폈습니다. 너무 조이면 종이가 숨을 못 쉬고, 너무 느슨하면 페이지가 흘러내립니다. 우리 사이의 말도 그랬습니다. 정답보다 결을 먼저 느끼고, 고치는 속도보다 숨을 먼저 살피면, 문장 끝이 덜 날카로워졌습니다. 덧댄 한지처럼 얇은 배려가 있으면, 오래된 상처도 다시 펼칠 수 있는 장이 되었습니다.

시편 기자는 이렇게 속삭였습니다. “그는 상한 마음을 고치시며 그들의 상처를 싸매시는도다”(시 147:3). 오늘 제본실의 한 땀 한 땀 속에서 그 말이 천천히 빛을 얻었습니다. 싸맨 자리는 영영 없어지지 않지만, 그 자리에 새 이야기가 붙습니다. 누군가가 나중에 이 책을 펼칠 때, 한때 찢겼던 자리까지 포함해 전체를 사랑하게 되겠지요.

저녁이 가까워지자 눌림틀에서 책이 조심히 꺼내졌습니다. 딱딱했던 등이 단정한 곡선을 띠고, 펼칠 때 나는 사근한 소리가 작게 방을 울렸습니다. 오늘의 마음도 그처럼 정돈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서둘러 넘긴 페이지들, 미처 읽지 못한 작은 기쁨, 덮어 둔 서운함이 서로의 자리를 찾는 모습이 떠올랐습니다. 고쳐졌다는 말보다, 계속 읽어갈 수 있게 되었다는 말이 더 어울렸습니다.

책은 다시 서가로 돌아가고, 제본실은 풀 향을 남긴 채 조용해졌습니다. 여백이 많은 페이지가 앞에 놓인 듯했습니다. 다음 문장을 어떻게 쓸지 아직 모르지만, 한 땀의 평안이 손바닥에 남아 있었습니다. 그 촉감이면 오늘 밤의 문장도 무리 없이 넘어갈 수 있겠지요. 남아 있는 줄기와 매듭, 그리고 기다림의 시간까지 함께, 한 권의 하루가 다 닫히는 소리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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