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머니 속 열쇠의 무게

📅 2025년 08월 24일 07시 01분 발행

저녁과 아침 사이의 얇은 시간, 현관 등불을 켜고 작은 서랍을 열었습니다. 건전지를 찾다 손끝에 걸려온 것은 오래된 열쇠 묶음이었습니다. 서로 부딪히며 내는 금속성 소리가 좁은 현관에 작은 파문을 만들었습니다. 어느 집의 대문이었는지, 어느 사무실의 서랍이었는지 이제는 떠오르지 않는 열쇠들이었습니다. 열쇠머리마다 미세한 흠집과 닳은 자국이 보였습니다. 그때의 날씨, 함께 웃던 얼굴, 서둘러 잠그고 뛰어가던 발걸음이 어렴풋하게 따라오는 듯했습니다.

문들은 사라졌는데, 열쇠는 남아 있었습니다. 그 사실이 이상하게 마음을 붙들었습니다. 우리 안에도 이런 열쇠들이 있지요. 어느 순간을 열기 위해 만들었지만 더는 맞지 않는 마음의 열쇠, 단단히 잠가두었다가 어느 날 돌려보려 했으나 방향을 잊어버린 용서의 열쇠, 마침내 사용하지 못한 고백의 열쇠. 때로는 맞지 않는 열쇠를 같은 자물쇠에 몇 번이고 억지로 밀어 넣다가, 아무래도 오늘은 닫혀 있는 편이 낫겠다는 생각에 주머니로 돌려 넣고 맙니다. 그리고 그 무게를 잊은 듯 들고 다닙니다.

열쇠는 손바닥에서 금방 차가워집니다. 그러나 오래 쥐고 있으면 체온을 조금은 나눠 가집니다. 그렇게 따뜻해진 금속을 바라보고 있자니, 문이 열린다는 것은 결국 안팎의 온기가 서로 만나서 생기는 일처럼 느껴졌습니다. 내 안의 따뜻함이 문턱을 넘고, 바깥의 온기가 틈으로 스며드는 순간, 오래 굳은 자물쇠도 저절로 부드러워지는 때가 있었습니다. “보라, 내가 네 앞에 열린 문을 두었으니…”라는 말씀이 소리 없이 스며들었습니다. 힘으로 비트는 손아귀보다, 조용히 기다리는 숨과 낮은 마음이 더 큰 힘을 갖고 있을 때가 있었지요.

열쇠는 신뢰의 흔적이기도 했습니다. 누군가 내게 맡겨 준 출입의 권한, 나도 누군가에게 건넸던 집의 번호와 약속의 자리. 잊힌 열쇠를 다시 마주하니, 그때의 나와 지금의 내가 서로 멀리 있지 않다는 사실이 보였습니다. 잠시 멈춰 그때의 표정들을 떠올려 보니, 열리지 않던 문 앞도 전부 낭비는 아니었습니다. 닫힌 문이 있었기에 우회로가 생기고, 우회로에서 만난 길동무가 있었습니다. 그 동무들과 나눈 말들이 오늘의 손을 덜 떨리게 해 주었습니다.

현관에 서서 열쇠 묶음을 천천히 구르니, 작은 방울 소리가 났습니다. 소리는 아주 작았지만 마음에 닿아 오래 남았습니다. 누구에게 전화 한 통을 걸어야 할지, 어떤 말은 더 이상 미루지 않아야 할지, 또 어떤 말은 그대로 묻어 두어도 괜찮을지, 소리가 가르쳐 주는 것 같았습니다. 열쇠가 많을수록 선택은 어려워지지만, 동시에 길은 더 많아지기도 합니다. 문과 문 사이를 건너는 법을 배울 수 있으니까요.

서랍에 열쇠를 다시 넣으며, 그중 몇 개는 굳이 버리지 않았습니다. 아직 쓰임이 남아 있을지도 모르고, 비록 지난 문을 위한 것이라 해도 나를 지나온 날들의 무게를 기억하게 해 줄 테니까요. 발치로 떨어지는 현관등의 빛이 고리에 번져 작은 원을 그렸습니다. 그 빛을 따라 오늘도 어느 문이 조용히 열릴 것 같은 예감이 들었습니다. 누구의 마음일지, 혹은 제 마음일지 알 수 없지만, 손바닥의 온기로는 그 방향을 어렴풋이 가늠할 수 있었습니다. 열린 문을 통과한 공기의 냄새는 늘 다르고, 그 다름이 하루를 새로 쓰게 합니다. 문이 열리는 소리는 들리지 않았지만, 그쪽에서 불어오는 따뜻함이 먼저 왔습니다. 그 따뜻함으로 충분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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