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25년 12월 08일 07시 01분 발행
점심 전, 동네 우체국은 조금 느슨한 숨을 쉬고 있었습니다. 도로에서 들어오는 바람 대신 문 위 작은 선풍기가 조용히 돌아가고, 카운터 너머에서는 붉은 잉크 도장이 한 번씩 탁 하고 눌릴 때마다 시간의 박자가 맞춰지는 듯했습니다. 대기표를 쥔 손에 종이의 얇음이 전해졌습니다. 오늘은 오래전 서랍에서 나온 엽서 한 장을 들고 왔습니다. 쓰다 만 인사말 뒤로 빈 칸이 길게 남아 있었지요. 끝내 하면 좋았을 그 몇 마디가 늘 가장 멀었습니다.
앞에서 기다리던 할머니는 과일 상자를 재활용한 소포를 올려놓고 주소를 또박또박 이야기하셨습니다. “이 동네가 이제는 이름이 바뀌었더라고요.” 직원은 고개를 끄덕이며 새 우편번호를 메모했습니다. 테이프가 상자 모서리를 한 번 더 감싸며 바삭한 소리를 냈습니다. 누군가의 손길이 닿을 곳을 떠올리니, 포장이라는 말이 조금 다르게 들렸습니다. 서둘러 덮은 테이프 아래에도 마음이 고이고, 모서리마다 조심스레 붙잡아 둔 안부가 묻어 있습니다.
제 차례가 가까워지자 엽서의 우표 자리를 손가락으로 문질렀습니다. 접착면의 얇은 향이 났고, 그 냄새가 어린 날 여름방학의 책상까지 잠깐 데려다 놓았습니다. 우표를 붙이고 주소를 적었습니다. 수신인의 이름을 적는 순간, 그 사람의 얼굴이 떠오르며 가슴 한쪽이 느슨해졌습니다. 발신인의 칸에는 제 이름. 순간 이상하게도, 이 작은 종이가 길을 찾아 떠나는 일을 떠올렸습니다. 분류함을 지나고, 바퀴 달린 검은 상자를 타고, 지역을 바꾸고, 경계를 넘고, 마침내 어떤 현관의 틈새까지. 종이 한 장도 제 길을 찾아 가는데, 사람의 마음은 얼마나 더 오랜 시간을 돌아서 가는가 싶었습니다.
우체국의 소리들은 나직했습니다. 도장 소리, 봉투를 스치는 손바닥의 마찰, 잔돈 떨어지는 금속의 얕은 울림. 그 가운데서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우리가 하루 동안 나누는 말과 침묵도 모두 어딘가로 발송되는 것 같다고요. 말은 말대로, 침묵은 침묵대로, 보낼 수밖에 없는 마음의 주소가 있습니다. 때로는 주소가 흐릿해 돌아오기도 하고, 어느 날은 생각지도 못한 손끝으로 정확히 도착하기도 하니까요.
성경에는 “여호와여, 내 혀의 말이 내게 알기 전에 다 아시나이다”(시편 139:4)라는 구절이 있습니다. 늘 먼저 읽어 주시는 분이 있다는 사실이 저는 자주 위로가 되었습니다. 정확한 주소를 적지 못하고 더듬거리던 날들에도, 말이 되지 않는 감정과 손에 쥔 공백마저 그분 앞에서는 길을 잃지 않는다는 뜻처럼 들립니다. 누군가는 이것을 기도라고 부를지도 모르겠습니다. 어떤 날은 기도라는 말조차 붙이지 못한 채, 그저 조용히 숨만 고르고 있었던 순간들까지 포함해서요.
직원은 제 엽서를 받아 들고 소인을 눌렀습니다. 붉은 날짜가 찍히자, 기묘하게 마음에도 날짜가 새겨지는 것 같았습니다. ‘오늘’이라는 낙인이, 이 글자들이 지나온 시간을 인정하면서도 앞으로 가야 할 길을 가리키고 있었습니다. 우리는 늘 오늘의 도장을 지나 내일로 건너갑니다. 하지만 오늘은 단지 통로가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우표의 모서리처럼 작은 자리에도 충실한 의미가 숨어 있고, 기다림의 의자에도 체온이 남습니다. 줄을 서 있던 사람들 사이로 서로 다른 사연들이 오가고, 보낸 이와 받는 이의 이름이 보이지 않는 곳에서 맞닿습니다.
문을 나서는데 주머니 속 대기표가 함께 나왔습니다. 번호는 금세 쓰임을 다했지만, 그 얇은 종이는 한참 동안 손끝에 남아 있었습니다. 순서가 있다는 사실이 낯설지 않았습니다. 마음의 일에도 순서가 있고, 때가 있고, 아직 비워둬야 할 줄의 여백이 있습니다. 엽서의 마지막 문장을 끝내 쓰지 않았던 이유가 갑자기 이해되었습니다. 빈 칸이어서 가능한 사랑이 있고, 나중에 읽힐 대답이 있으니까요.
돌아오는 길, 횡단보도 앞에서 빨간 불을 바라보았습니다. 잠깐 멈춰 서 있는 사람들의 어깨 너머로 각자의 주소가 떠다니는 것 같았습니다. 오늘의 숨, 오늘의 침묵, 오늘의 미소 한 장씩. 언젠가 우리도 누군가의 현관 앞에 닿을 것입니다. 그때를 떠올리며, 아직 봉하지 않은 마음 한 귀퉁이를 손바닥으로 살짝 눌렀습니다. 도장이 채 마르지 않은 붉은 빛이, 조용히 반짝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