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파수를 맞추는 밤

📅 2025년 11월 15일 07시 01분 발행

늦은 밤, 부엌 등 하나만 켜 두고 서랍에서 오래된 트랜지스터 라디오를 꺼내 보았습니다. 네모난 플라스틱 몸통에는 세월이 만든 잔기스가 번졌고, 스피커 천에는 조그만 올이 풀려 있었습니다. 전원을 올리자 낮은 웅얼거림이 먼저 깔리고, 그 위로 먼지의 결을 스치는 듯한 소리가 얇게 겹쳤습니다. 눈금 위를 미끄러지는 빨간 선이 아주 천천히 움직입니다. 숫자와 숫자 사이, 머리카락 한 올 너비의 간격마다 소리가 달라집니다. 지지직, 살짝 금속을 긁는 듯한 마찰음. 어느 지점에서는 두 방송이 겹쳐 들리다가, 반 발자국 옮기면 한 목소리만 또렷해집니다. 손끝을 조금만 과하게 쓰면 금세 흐려지고, 숨을 고르듯 다이얼을 고요히 감싸 쥐면 소리가 선명해집니다.

그 순간 마음의 안쪽도 함께 조율되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하루 동안 흘러들어온 말들과 걱정, 미처 정리하지 못한 표정들, 어제의 후회가 내는 작은 소란이 라디오의 잡음 같아졌습니다. 엘리베이터 거울에 비친 우리 얼굴은 어딘가 각이 서 있고, 집안에는 쌓아 둔 고요가 있는데 마음은 번갈아 채널을 갈아타고 있었지요. 삶은 종종 그와 닮아, 겨우 반 마디의 차이, 한 호흡의 간격 때문에 서로를 놓칠 때가 있습니다. 조금 더 설명하려다 오히려 진심이 멀어지고, 침묵을 두려워해 말을 채우다 중요한 신호를 지나칩니다. 손끝의 힘을 덜어내는 만큼 소리가 또렷해지듯, 마음의 긴장을 풀어낸 자리에서 의미가 분명해질 때가 있습니다.

주님을 향한 우리의 귀도 그러한 때가 많습니다. 크게 울리는 확신보다, 가늘고 낮은 숨소리 같은 평안이 먼저 닿을 때가 있습니다. 특별한 자리를 찾지 않아도, 설거지 물 위로 떨어지는 접시의 둔탁한 울림 사이로, 다 마른 타월을 접는 손끝의 조용한 리듬 사이로, 설명하기 어려운 위로가 스며옵니다. 성경은 이렇게 속삭입니다. “내 양은 내 음성을 들으며 나는 그들을 알며 그들은 나를 따르느니라”(요한복음 10:27). 그 음성은 대개 의지가 팽팽할 때보다, 힘이 빠져 기대게 될 때 더 잘 들립니다. 다이얼을 억지로 밀어붙이는 힘이 아니라, 잠깐 멈추어 귀를 기울이게 되는 마음에서 빛이 납니다. 무언가를 성취하려는 결의가 아니라, 사랑을 알아보려는 그리움이 주파수를 맞추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밤이 깊을수록 먼 곳의 방송이 선명해지듯, 소리가 줄어든 시간에는 오래 미뤄 둔 마음이 모습을 드러냅니다. 오늘 서랍에 넣어둔 답장하지 못한 편지, 끝내 건네지 못한 짧은 안부, 스스로에게만 유난히 거칠었던 말들이 하나씩 떠오릅니다. 그것들을 서둘러 정리하려 들면 금세 다시 잡음이 커지곤 했습니다. 라디오의 물결이 지나가듯 잠시 건너가게 두니 이상하게 덜 무거워졌습니다. 잡음과 맑은 음이 번갈아 흐르다가도, 어느 순간 한 문장이 정확히 가슴에 닿습니다. “괜찮다.” “여기 있다.” 말은 짧은데, 그 사이에 넓은 품이 실려 있습니다. 멀리서 오는 신호가 길을 잃지 않고 도착했다는 듯, 눈에 보이지 않는 온기가 방 안에 가만히 퍼집니다.

라디오를 끄기 전, 다이얼을 조금 왼쪽에 두어 보았습니다. 내일 다시 켰을 때 오늘 찾아낸 그 지점을 기억하려는 마음이었습니다. 우리의 내면에도 그런 표시 하나가 있으면 좋겠습니다. 다급함에 밀려 놓쳐버리지 않도록, 오늘의 평안을 가리키는 얇은 선 하나. 그 선을 떠올리면, 어제의 실패나 내일의 계획이 아닌 지금 이 자리에서 이미 주어지고 있는 선물을 다시 보게 됩니다. 전파는 보이지 않지만 쉼 없이 흐르듯, 자비도 묻지 않고 흘러옵니다. 우리는 다만, 그 방향을 알아보는 작은 기울기만으로도 충분한 때가 있습니다.

아주 작은 소리로라도 맞춰진 주파수는 방의 온도를 바꾸어 놓습니다. 컵에 남은 물이 가볍게 떨리는 듯하고, 냉장고의 낮은 진동과 어울려 하나의 배경이 됩니다. 그 배경 위에서 마음은 서서히 제 음색을 되찾습니다. 오늘 밤, 잡음 사이로 불쑥 또렷해진 한 목소리가 있었다면, 그 기억만으로도 하루가 끝나며 가벼워지는 느낌이 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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