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25년 09월 06일 07시 01분 발행
늦은 저녁, 식탁 위에 오래 쓰던 식탁보를 펼쳐 놓았습니다. 가장자리쯤, 작게 찢어진 부분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눈에 띄지 않게 접어 덮어 쓸 수도 있었지만, 오늘은 그러고 싶지 않았습니다. 서랍에서 바늘과 흰 실, 작은 골무를 꺼내 조용히 앉았습니다.
바늘귀에 실을 넣는 일이 생각보다 쉽지 않았습니다. 숨을 천천히 고르고, 조명을 바늘끝 가까이에 가져왔습니다. 실 한 가닥이 좁은 틈을 통과하는 순간, 마음도 함께 얇아져 조용해지는 듯했습니다. 참, 하루란 것도 이렇게 작은 구멍들을 통과하며 이어지는 것 같다는 생각이 스쳤습니다.
실 끝에 아주 작은 매듭을 맺었습니다. 티나지 않는 작은 매듭 하나가 전체를 붙들어 주는군요. 우리의 일상도 그런 매듭들로 유지되는 것 같습니다. 누군가의 짧은 안부, 건네지 못한 미안함을 마음속에서 미리 건네 본 일, 소리 내지 않고 넘어간 서운함 같은 것들 말입니다.
한 땀, 또 한 땀, 바늘이 천을 드나듭니다. 왜 찢어졌을까요. 지난 주일 저녁, 급히 그릇을 옮기다 잠깐 걸렸던 그 순간이 떠오릅니다. 그 자리에 웃음이 있었고, 말이 모자라 침묵이 잠시 머물렀고, 따뜻한 그릇의 물자국이 천에 남았습니다. 찢김은 뜻밖의 사고였지만, 그 위에는 함께 식사하던 손과 이야기들이 겹겹이 놓여 있었습니다.
사실 흠집은 늘 불청객이지만, 전부 나쁘지만은 않은가 봅니다. 흠집을 피해 멀리만 두고 살았다면, 서로 닿는 기쁨도 줄어들었을 테니까요. 마음이 닿는다는 것은 때로 해어짐을 감수한다는 말과 함께 오는 듯합니다.
관계도 천과 비슷합니다. 서두른 말이 모서리를 당기고, 미뤄 둔 사과가 숨은 올을 끊을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 수선은 종종 늦게 시작되지만, 늦었다고 해서 무의미하지는 않은가 봅니다. 어긋난 자리를 다시 꿰매는 동안, 손끝에서 오래 미뤄 둔 마음의 모양이 보이기도 합니다.
바늘끝이 천을 찌를 때마다 손끝이 작게 뜨거워지고, 골무가 가끔 소리를 냅니다. 그 소리는 누군가를 포기하지 않겠다는 작은 약속처럼 들렸습니다. 서툴고 비뚤어진 땀이라도, 이어지기 시작한 마음은 자꾸 이어지려 합니다.
하나님은 낡고 해어진 것을 쉽게 치우시는 분이 아니시지요. 가까이 앉아 함께 손을 맞대고 꿰매시는 분 같습니다. “그는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며, 꺼져 가는 심지를 끄지 아니하신다”(이사야 42:3)라는 말씀이 오늘은 유난히 바늘처럼 선명하게 다가옵니다. 버려진 자리를 새로 붙여 주시겠다는, 가장 부드러운 방식의 강함이 느껴졌습니다.
수선은 벌이 아니라 동행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비록 제 바느질은 표가 많이 나고, 같은 자리를 몇 번이나 다시 지나가야 하지만, 어제의 틈이 오늘의 무늬가 되어 갑니다. 상처가 사라지는 게 아니라, 다른 이름으로 살아남는 것이겠지요.
다 꿰매고 뒤집어 보니 가까이서는 실밥이 도드라집니다. 그런데 조금 물러서서 보니까, 그 자리도 식탁보의 주름과 함께 어우러져 다른 빛을 냅니다. 흉터가 세월 안에서 새로운 질감이 되는 것과 닮았습니다. 완벽하진 않지만, 건너갈 수 있는 다리 하나가 생긴 느낌입니다.
남은 실을 조심스레 잘라 냈습니다. 매듭이 작을수록 천은 더 자연스러워지더군요. 크게 말하지 않은 사랑이 오래 남는다는 것을, 손끝에서 다시 배우게 됩니다. 그저 필요한 만큼만 묶어 두고, 나머지는 조용히 놓아 줍니다.
밖이 서서히 어두워졌습니다. 주전자에서 오르는 가느다란 김이 부엌을 부드럽게 적셨습니다. 저는 작은 찢김 하나를 통해 제 안의 해어진 생각들을 떠올렸습니다. 오늘 마음의 가장자리에서 삐걱거리던 부분이 어디였는지, 누구의 이름이 그곳에 얹혀 있었는지 조용히 지나가 보았습니다.
다시 접어둔 식탁보가 서랍 속에서 부피를 줄이며 들어갑니다. 언젠가 이 식탁보가 또 다른 저녁을 맞이하겠지요. 그때 오늘의 실밥은 아마 식탁 위에 놓이는 그릇들과 대화를 나누듯, 아무 말 없이 자리를 지킬 것입니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우리 삶의 작은 매듭들은 어디에서, 누구와 함께 빛을 낼까요. 티 나는 자리였어도 괜찮다는 확신이, 오늘 밤 조금은 더 가까워진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