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송가 사이에 눌린 금빛

📅 2025년 10월 08일 07시 01분 발행

서랍을 정리하다가 오래된 찬송가 한 권을 꺼내 들었습니다. 표지는 손때로 반들거렸고, 모서리는 부드럽게 닳아 있었습니다. 책장을 조심스레 넘기는데, 두 장 사이에서 납작하게 눌린 은행잎 하나가 흘러내렸습니다. 순간 오래된 기침 소리처럼 가벼운 바스락이 들렸습니다. 잎맥의 결이 그대로 살아 있었고, 금빛은 세월을 통과해도 묘하게 따뜻했습니다.

어느 때 그 사이에 끼워 두었는지 선명하지 않았습니다. 다만 그날의 마음은 어렴풋이 떠올랐습니다. 마음이 복잡하여 고개를 들기 어려웠던 오후였는지, 아니면 기쁜 소식을 나누고 돌아오던 저녁이었는지. 손끝의 잎사귀는 아무 말이 없었지만, 한때 살아 있던 것이 미세한 숨을 고이 간직한 모양새였습니다. 많이 말하지 않아도 전해지는 것이 있습니다. 잎사귀 하나가 그랬습니다.

찬송가의 그 페이지에는 연필로 아주 연한 동그라미가 쳐져 있었습니다. 후렴의 한마디에만 작은 선이 겹겹이 닿아 있었고, 그 곁에는 날짜인지 낙서인지 모를 숫자가 희미하게 남아 있었습니다. 누구의 손이었는지는 모르지만, 그 작은 힘줄 같은 메모가 오래된 등불처럼 마음을 밝혔습니다. 삶의 무게가 우리를 누를 때, 사람은 종종 자국을 남기고 싶어하는가 봅니다. 잊지 않기 위해, 혹은 나중에라도 다시 만날 수 있도록.

은행잎을 다시 펼친 책 사이에 올려 두었습니다. 주방에서 끓던 주전자의 김이 잦아들며 방 안의 공기도 차분해졌습니다. 시간은 어제와 오늘의 경계에서 조용히 흘러가는 중이었고, 잎사귀의 끝은 아주 조금 부스러져서 손바닥에 금빛 점을 남겼습니다. 그 점을 들여다보다가, 오래 기다리는 것만이 지켜낼 수 있는 색이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서둘러 건 건 다 흐릿해졌는데, 오래 눌려 있던 것은 도리어 또렷했습니다.

전도자는 말합니다. 하나님이 모든 것을 때에 아름답게 하셨다(전도서 3:11). 그 구절은 늘 먼 곳의 선언처럼 느껴졌는데, 오늘따라 손안의 얇은 잎이 그 말을 현실로 옮겨놓았습니다. 때는 손으로 잡아당길 수 있는 끈이 아니고, 마음대로 앞당길 수 있는 약속도 아니었습니다. 그저 주어진 호흡만큼 머물러 주는 무엇. 그 머묾 속에서 색이 익고, 말이 잦아지고, 소리가 깊어지는 듯했습니다.

한동안 잎사귀를 바라보며 떠올린 얼굴들이 있었습니다. 오래 병상 곁을 지킨 사람, 답이 보이지 않아도 매일 문 앞까지 걸어오는 사람, 말 대신 손을 포개어 놓는 사람. 누구도 눈에 띄게 무엇을 해내지는 않았지만, 그 곁에서 시간이 다르게 흘렀습니다. 조용히, 그러나 단단하게. 눌려 있는 동안 잎사귀는 빛을 잃지 않았습니다. 우리 마음도 그럴 수 있겠다 싶었습니다. 큰일을 하지 않아도, 오늘을 부드럽게 누르고 있을 수 있다면.

찬송가를 덮으면서 잎사귀를 다시 사이에 눕혔습니다. 그 얇은 무게가 책에 닿는 느낌이 뜻밖에 든든했습니다. 어쩌면 신앙이란, 커다란 증명보다 작은 것을 잃지 않고 간직하는 일에 가까운지도 모르겠습니다. 서늘한 밤공기 앞에서 서로의 이름을 다시 불러 주고, 일상의 가장자리에 흘린 숨을 가만히 주워 담는 일. 그렇게 하루가 겹겹이 눌리고, 다음 계절을 통과할 때 비로소 드러나는 색이 생기는 법입니다.

책등을 책장에 세워 두었습니다. 방 안은 조용했고, 잎사귀는 다시 말이 없어졌습니다. 말이 없음이 반드시 비움은 아니라는 것을 알고 나니, 마음이 조금 넓어졌습니다. 오늘의 걸음이 더디어도 괜찮다는 확신까지는 아니더라도, 너무 늦지 않았다는 느낌 하나쯤은 손에 쥐어진 듯했습니다. 잠시 후 다시 일상으로 흩어지겠지만, 찬송가 사이에 눌린 금빛이 오래 기억을 붙들어 줄 것 같습니다. 그 색이 사라지지 않듯, 우리의 작은 믿음도 서둘러 설명하지 않아도 되는 날이 오리라는 생각과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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