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팅지 위의 햇빛

📅 2025년 11월 24일 07시 01분 발행

도서관 한쪽, 오래된 목제 작업대에 앉아 헌 책에 비닐을 입히는 시간을 보내었습니다. 창가에서 들어오는 오후의 빛이 코팅지에 얇게 부서져 미세한 먼지까지 또렷하게 드러났지요. 손끝으로 비닐을 조금씩 내려붙이며 작은 헤라로 공기를 밀어냈습니다. 서둘러 당기면 주름이 박혀 평생 그 자리에 남겠지요. 그래서 한 줄 한 줄, 손바닥의 온기로 눌러가며 기다리는 일이 필요했습니다. 그 사이 풀 냄새가 은근히 올라왔고, 종이는 아주 약한 소리로 숨을 고르는 듯했습니다.

반납함에서 건져 올린 책들은 대개 표지가 닳아 윤이 사라졌고, 모서리는 부스러져 종이결이 드러나 있었습니다. 몇 장은 가장자리가 찢겨 얇은 테이프로 매만져야 했습니다. 낡았지만, 그 낡음 속에 누군가의 길게 이어진 시간이 있었습니다. 연필로 남겨진 작은 물음표, 접힌 페이지 귀퉁이, 커피가 떨어진 자리. 읽는 이의 삶이 조용히 묻어 있었습니다. 새 책으로 갈아치울 수는 있겠지만, 이 책이 품은 온기를 대신할 수는 없겠습니다.

문득 마음이 떠올랐습니다. 우리에게도 모서리처럼 해진 부분이 있지요. 말과 침묵이 갈라진 틈, 오래 견디는 동안 생긴 주름, 조용히 숨기고 싶은 얼룩. 그럴 때 하느님께서 폐기함으로 분류하지 않으신다는 사실이 참 고맙습니다. 성서는 이렇게 속삭입니다.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고, 꺼져 가는 심지를 끄지 아니하신다”(이사야 42:3). 낡음 속에 깃든 이야기를 귀하게 여기시고, 급히 당기지 않으시며, 손의 온기를 오래 얹어두시는 분. 마치 오늘 제 앞의 책처럼요.

코팅지 아래 갇힌 작은 기포를 헤라로 밀어낼 때, 마음속에 떠다니던 불안의 둥근 방울들이 겹쳐 보였습니다. 힘을 주면 더 크게 번져버리곤 했지요. 그런데 손끝의 속도를 늦추고 햇빛이 비치는 방향을 따라가면, 기포가 자연히 가장자리로 흘러갑니다. 사라지기까지는 잠시의 시간과 가벼운 인내가 필요했습니다. 사랑도 그와 닮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한 번에 모든 주름을 펴지 못하더라도, 기다림과 온기만으로도 무언가는 조금씩 달라집니다.

작업을 마친 책들은 수선 기록 스탬프를 하나씩 눌러 서가로 돌아갈 준비를 마쳤습니다. 누군가의 손에 다시 들려 새로운 길을 걸을 것입니다. 상처가 사라진 것은 아니지만, 이제는 다시 넘어갈 수 있는 페이지가 되었습니다. 삶도 그럴 수 있겠습니다. 완벽해진 다음에야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손봐진 채로 조심스레 이어지는 것. 모퉁이의 테이프와 코팅지의 빛이 그 용기를 살짝 더해줍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가방 속에 오늘 했던 작업의 감촉이 남아 있었습니다. 마음에 붙들고 싶던 문장 하나가 있었습니다. 누군가에게, 그리고 제게도, 고쳐 읽는 시간이 여전히 허락되어 있다는 사실. 하루가 저물어가도 손의 온기를 기억하는 페이지처럼, 우리도 그 온기를 기억하며 다시 한 줄을 읽어 갈 수 있겠습니다. 그렇게 잔잔히 이어지는 독서처럼, 삶도 다음 장을 기다리게 만드는 무언가를 품고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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