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방울의 시간

📅 2025년 10월 28일 07시 02분 발행

이른 시간, 동네 방앗간 문 앞에 서 있었습니다. 아직 문패에 달빛이 조금 남아 있을 때였지요. 안에서 기계가 낮게 웅웅거리며 깨어나는 소리가 났고, 구수한 냄새가 복도처럼 길게 퍼졌습니다. 제 손에는 번호표가 한 장, 얇은 종이가 오늘의 차례를 조용히 알려주고 있었습니다.

주인어른이 참깨를 큰 통에서 퍼 올려 누런 깔때기에 부었습니다. 돌과 쇠가 맞물리는 소리, 천천히 올라가는 온기, 그리고 마침내 첫 방울이 떨어졌습니다. 처음의 한 방울은 늘 머뭇거리는 듯 보입니다. 하지만 곧 굵고 묵직한 색이 이어지고, 유리병 목을 적시며 향기가 방 안을 채웠습니다. 아무 말 없이 그 모습을 바라보는 사람들이, 방앗간 안의 또 하나의 풍경처럼 가만히 서 있었습니다.

기다리며 생각했습니다. 하루하루 우리에게도 작은 씨앗들이 쌓이는구나, 하고요. 누군가에게 건넨 안부, 미처 보내지 못한 사과, 급히 넣어둔 한숨과 아직 꺼내지 않은 다짐들이, 마음의 통 안에 고요히 담겨 있습니다. 그리고 어느 순간, 시간의 무게와 온기가 더해질 때, 그 안에서 무엇이 우리에게서 흘러나올지요. 어떤 날은 마음에 아직 눌림이 부족해 향이 올라오지 않는 듯 느껴집니다. 비어 있어서가 아니라, 아직 따뜻함이 골고루 스며들지 않은 탓일지도 모르겠습니다.

방앗간은 서두르지 않습니다. 기름이 맑게 나오려면 속까지 따뜻해져야 한다는 것을 주인어른은 오래전부터 몸으로 배웠습니다. 급히 눌러도 병은 채워지지만, 맛은 어딘가 얇아집니다. 기다림이 맛을 두껍게 하고, 무게가 향을 깊게 합니다. 우리는 종종 빨라지는 세상의 박자를 따라가느라, 우리 안에서 무르익는 시간을 놓치곤 하지요.

살다 보면 저마다의 무게를 가슴에 얹고 지납니다. 가족을 돌보는 책임, 불확실한 소식이 남기는 그림자, 건강에 대한 염려처럼 말없이 눌러오는 것들이 있습니다. 그 무게가 우리를 부수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더 부드럽게 만들기도 한다는 사실을, 저는 방앗간에서 종종 떠올립니다. 하나님의 손 아래서 무게는 파괴가 아니라 깊이가 되곤 합니다. 누군가에게 건네는 한 숟가락의 온기, 말끝에 남기는 여운, 눈빛에 담긴 인내가 그 증거가 되는 것 같습니다.

전도서의 한 구절이 문득 떠올랐습니다. 하나님이 모든 것을 때를 따라 아름답게 하셨다는 말을요(전도서 3:11). 그 말씀은 늘 성급해지는 제 마음을 다정하게 붙잡아 줍니다. 아직 때가 아닌 것과 이미 지나간 것을 구분하게 하고, 지금 여기에 스며들어 있는 온기를 놓치지 않게 합니다.

순서를 마친 이가 병을 받아 들고 나갑니다. 두 손으로 병을 안듯 들고 서둘러 발걸음을 옮기는 모습에서, 오래 품어온 따뜻함을 마침내 얻은 사람의 표정을 보았습니다. 어쩌면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은혜는 큰 변화가 아니라, 밥 한 그릇 위에 떨어지는 한 숟가락의 빛 같은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그 한 숟가락이 평범한 하루를 포근하게 감싸 주곤 하니까요.

저녁이 되면 식탁에 향이 돕니다. 오늘의 일들이 각자의 그릇에 담겨 돌아오고, 말 대신 향으로 서로의 수고를 알아봅니다. 눌림과 기다림이 만든 맛을 나누며, 우리는 덜 거칠어집니다. 설명보다 조용한 향이 먼저 마음을 풀어 주는 때가 있습니다.

주인어른은 병에 날짜를 적어 건네며 미소를 지었습니다. 새것은 새것일 때 나눌수록 좋다는 뜻이겠지요. 선함도 그렇다고 생각했습니다. 오래 저장해 둘수록 향이 줄어들고, 나눌수록 손에 향이 배어 나옵니다. 어쩌면 축복은 모아두는 기술보다 흘려보내는 용기에서 더 선명해지는지 모르겠습니다.

문을 나서자 찬 공기가 코끝을 맑게 했습니다. 코트에 밴 고소한 냄새가 한동안 따라왔습니다. 세상은 그대로였지만 제 걸음에는 작은 빛이 스며 있었습니다. 오늘을 어떻게 채웠는가보다, 오늘 안에서 무엇이 조용히 흘러나왔는지가 더 오래 마음에 남았습니다. 흰 접시 위에 동그랗게 번지는 금빛, 그 작은 원 안에 오늘을 견디게 하는 이유가 조용히 깃들어 있었습니다.

Scroll to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