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26년 02월 16일 07시 01분 발행
오늘 낮, 교육관의 오래된 피아노를 조율사가 다녀갔습니다. 덮개를 조심스레 열고, 현들 사이에 얇은 펠트를 끼워가며 한 음씩 꺼내 들었습니다. 작은 망치가 튜닝 핀을 아주 조금 움직일 때마다, 거의 들리지 않는 숨소리만 방 안을 채웠습니다. 그 고요가 음의 짝처럼 함께 머무는 광경을 오랜만에 보았습니다.
몇 해 사이 음이 조금씩 내려앉았다는 말이 들렸습니다. 예배마다 큰 탈 없이 찬양을 드려 왔지만, 어쩐지 곡의 가장자리들이 흐려져 있었지요. 정확도의 문제가 아니라, 마음이 찾아갈 자리의 문제였습니다. 음이 제 자리를 찾자 공기가 펴지고, 눈에 보이지 않는 먼지가 가라앉는 듯했습니다. 같은 건반인데, 소리의 표정이 달라졌습니다.
우리의 하루도 비슷한 모습을 띠는 것 같습니다. 말 한마디의 온도, 일정의 무게, 사소한 염려들이 현을 조금씩 아래로 끌어내립니다. 너무 팽팽하면 금이 가고, 너무 느슨하면 어두워집니다. 조율은 고함이 아니라 미세한 돌림으로 이루어지고, 손보다 귀가 먼저 움직입니다. 마음의 온기를 세게 올리기보다, 들어야 할 떨림을 오래 듣는 일이 더 선명한 변화를 가져옵니다.
조율사는 자신의 호흡을 건반에 맞추었습니다. 한 음을 길게 울려 보내고, 미세한 파동이 정리되는 순간을 기다렸습니다. 맞춰지는 과정은 강요가 아니라 설득처럼 부드러웠고, 어느새 공간이 그 설득에 고개를 끄덕이는 듯했습니다. 기도도 그러하면 좋겠습니다. 여러 말을 앞세우기보다, 숨을 한 번 길게 고르고, 존재를 조용히 내어맡겨 보는 일 말입니다.
‘너희는 가만히 있어 내가 하나님 됨을 알지어다.’ 시편의 이 한 구절이 오늘따라 속삭임처럼 들렸습니다. 가만히 있다는 건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게 아니라, 귀를 열어 한 음을 끝까지 듣는 일과 닮아 있습니다. 그 한 음이 중심이 될 때, 나머지 음들은 서둘지 않고 자기 자리를 찾아옵니다.
오늘 마주한 사람들의 말에도 각자의 음색이 배어 있었습니다. 서둘러 내 논리를 올리지 않고, 먼저 그분의 중심음을 찾아보려 했습니다. 때로는 답이 늦어지는 침묵이야말로 관계를 살리는 리듬이 됩니다. 조율사가 페달을 살짝 밟아 울림을 확인하듯, 우리 마음의 페달도 가볍게 눌러지는 저녁이 있으면 좋겠습니다. 겹겹의 감정이 무심히 섞이지 않고, 조심스레 섞이는 밤 말입니다.
조율이 끝나자 방 안에 환한 적막이 깃들었습니다. 뚜껑을 덮는 순간, 조율사가 분필로 남긴 작은 점 하나가 눈에 들어왔습니다. 괜찮다는 신호처럼 보였습니다. 저도 제 안의 어긋난 현들 곁에 그런 희미한 점을 찍어두고 싶었습니다. 아직 완벽하진 않지만, 돌아오는 중이라는 표식 말입니다. 그 표식을 보고 있자니, 서둘러 완성하려 했던 마음이 한 발 물러나 주었습니다.
첫 음을 눌렀을 때 맑은 소리가 천천히 번졌습니다. 복잡했던 생각들이 자리로 돌아가고, 숨이 길어졌습니다. 하나님께서 오늘도 우리 각자의 귀를 세워 주시고, 들어야 할 음을 들려주시기를 조용히 바라봅니다. 음악이 크지 않아도 괜찮습니다. 한 음이 또렷해지면, 삶의 나머지 음들이 그 뒤를 따라오는 법이니까요.
어둑해진 복도에 문틈 사이로 얇은 선율이 흘렀습니다. 저마다의 밤에도 보이지 않는 기준음 하나가 낮게 깔려 있기를, 그 음을 기억하는 마음으로 잠자리를 준비할 수 있기를 조용히 생각해 봅니다. 오늘의 끝맺음이 과장된 화음이 아니라, 제자리를 찾은 한 음의 고요함이면 충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