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스를 말아 두는 저녁, 손에 남은 물기

📅 2025년 12월 15일 07시 02분 발행

해가 천천히 내려앉던 저녁, 옥상 텃밭에서 호스를 감았습니다. 고무 호스는 하루 내내 햇빛을 먹은 듯 미지근했고, 손바닥에 미세한 냄새를 남겼지요. 물의 마지막 숨이 지나가는지, 호스의 살이 한 번 가볍게 떨리고는 조용해졌습니다. 콘크리트 바닥에는 둥글게 번진 물자국이 남아 있었고, 가장자리는 조금 더 진한 회색으로 오래 붙들려 있었습니다. 멀리서 누군가 부엌에서 식기를 포개는 소리가 간헐적으로 닿았고, 저녁의 그림자는 한쪽으로 조금씩 자리를 옮겼습니다.

물자국을 바라보고 있으면, 하루가 어떻게 우리 안에서 스며드는지 어렴풋이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어떤 날의 일은 금세 마르고, 어떤 말은 오래 남아 마음의 구석을 차갑게 적시지요. 재촉한다고 빨리 마르는 것도 아니고, 외면한다고 흔적이 사라지는 것도 아닌 듯했습니다. 물이 서서히 바닥으로 스며드는 동안, 흙은 보이지 않는 갈증을 채우고 있었을 것입니다. 우리 마음도 그렇게 조용히 흡수하고, 또 오래 버티다가, 어느 순간 드러나지요.

호스를 동그랗게 말아 두고 나니, 걱정에도 모양이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풀어져 있을 때는 여기저기 걸리다가, 말아 두면 한 곳에 묶여 더 이상 발목을 잡지 않는 모양이요. 그렇다고 걱정이 없어지는 것은 아니고, 그저 자리를 정돈해 잠깐 숨을 돌리는 정도일 것입니다. 누구의 하루든, 잠깐의 정리와 고요가 필요하지요. 그 사이에 마음은 자신이 감당한 것들을 가만히 어루만집니다. 오늘 들었던 목소리와 마주쳤던 눈빛, 미처 답하지 못한 질문들까지, 하나씩 표면 위로 떠올랐다가 다시 내려갑니다.

저는 가끔 그런 순간이 은혜처럼 느껴집니다. 특별히 대단한 사건이 없는데도, 손등에 묻은 몇 방울의 물이 작은 렌즈가 되어, 저녁 하늘을 조각조각 담아 보여줄 때가 있습니다. 그 조각을 통해 오늘의 저는 어떤 표정을 짓고 있었는지, 무엇을 붙들고 있었는지, 천천히 알아차리게 됩니다. 스스로를 책망하기보다, 참 고단했겠구나, 그 정도로도 애썼구나, 그렇게 말이 나옵니다. 사람의 마음은 대답을 요구하기보다, 먼저 이해받기를 바랄 때가 많지요.

물자국은 끝부분부터 연해지면서 중심을 남깁니다. 옅어진 테두리를 따라가다 보면, 우리가 견딘 시간도 비슷하게 생겼다는 생각이 듭니다. 처음엔 싸늘했지만, 시간이 지나며 가장 모진 부분이 먼저 풀리고, 마지막까지 남는 것은 뜻밖에 가장 고운 마음이었음을 뒤늦게 알게 되는 때가 있지요. 어떤 분은 얼른 말랐으면 하고 바라실 테고, 어떤 분은 조금만 더 머물러 주었으면 하실 수도 있겠습니다. 이유는 다르지만, 각자의 자리에서 그 마음을 품고 서 계시리라 짐작합니다.

호수처럼 반짝이는 물고임 하나가 배수구 근처에 남아 있었습니다. 그 위로 저녁빛이 얇게 내려앉더니, 하늘의 색이 뒤집혀 들어왔습니다. 낮 동안의 분주함이 그 작은 원 안에서 낯선 표정을 하고 서 있는 것 같았습니다. 이내 고임은 한쪽으로 방향을 바꾸어 천천히 사라졌지요. 흔적은 금세 말라 평평해졌지만, 흙은 방금 지나간 것의 온도를 기억하고 있을 것만 같았습니다. 우리의 하루도 그럴지 모르겠습니다. 누구에게 크게 보여지지 않아도, 보이지 않는 곳에선 분명히 스며들어 누군가의 목마름을 적셨을지요.

호스를 벽에 걸어 두고 내려오는데, 손에 남은 물기가 아직 마르지 않았습니다. 그 미세한 서늘함이 오늘의 안부처럼 느껴졌습니다. 말없이 곁을 지키는 온기와 서늘함이 교대로 찾아와 우리를 살려 내곤 하지요. 오늘도 각자의 자리에서 지나온 시간들이 서로를 향해 작은 통로를 만들고 있을 것입니다. 누군가의 마음밭에 닿은 방울 하나가 조용히 스며드는 동안, 우리도 모르게 숨이 한결 고르게 이어졌습니다. 그 숨이 어디까지 닿아 있었는지, 내일 아침이면 조금 더 또렷해져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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